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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2416

암울이 겹치는 중대 신라왕실, 유성은 삼대성을 침범하고 천구성은 곤방으로 곤두박칠하다 삼국사기 문무왕본기下를 보면 그 말년에 두 가지 이상 천문 징후가 있으니, 그가 죽기 직전 재위 21년 5월에는 유성流星이 삼대성參大星이라는 별자를 침범한 일이 있는가 하면 그 다음달에는 천구天狗라는 별이 곤방坤方에 떨어지는 일이 있었다 한다. 이런 천문 이변은 뭐 복잡하게 따질 것 없이, 보통 왕과 그에 준하는 중요한 인물이 곧 죽거나 혹은 왕조 자체가 멸망할 때 그것을 암시하는 전형의 예고편이라 이 경우는 더 간단해서 문무왕 김법민이 7월 1일 죽을 것임을 암시하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왜? 저와 같은 일은 보통이면 일어나서는 안 되지만 일어났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상례의 파괴로 해석된 까닭이다. 한데 문제는 저 두 가지 사건이 모조리 문무왕 죽음을 암시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저 둘을 각.. 2024. 3. 9.
남들 다 해먹고 박물관장 막차 탄 최순우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는 같은 개성 출신으로 같은 우현 고유섭을 사사했다 하지만, 나란히 1918년생인 황수영 진홍섭보다 두 살이 많다. 더구나 황과 진 두 사람이 비교적 일찍 학계 교수로 튄 것과는 달리 끝까지 박물관을 지켰으니, 태평양전쟁 말기 박물관에 발을 디딘 이래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가 국립중앙박물관장직을 퇴사한 시점이 1984년 12월 1일이요, 그가 사망한 시점은 그보다 보름 뒤인 같은달 16일이다. 사임 시점 문공부 장관 이진희랑 한 판 붙었다는데, 그 충격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저 3인방 중 진홍섭은 국립박물관 산하 경주박물관장(실은 분관장)을 하다가 1963년에 이화여대로 튀었다. 학계에는 비교적 늦게 진출했다. 최순우 이력을 보면 1943년 고유섭이 관장.. 2024. 3. 8.
사설학원 열어 연명하는 조선시대 유배 생활 황자黃梓(1689)~?) 1734년 진주사행陳奏使行이라는 대청 사신단에서 서장관 자격으로 북경을 간다. 이때 정사正使가 서명균徐命均, 부사副使가 박문수朴文秀였다. 갑인연행록甲寅燕行錄은 이 사행길에서 그가 보고 들은 내용을 정리한 것이라, 청淸 옹정제雍正帝 12년, 조선 영조 10년 갑인년이라 해서 이리 이름하고 그의 문집 필의재유고畢依齋遺稿에 수록됐다. 7월 2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잘 다녀오겠다고 영조를 배알하고 출발한 삼사三使는 이후에는 각자 도생이라 만났다가 헤어지고 각자 개인일도 보고 하는 요새 같으면 있을 수 없는 행태를 보이는데, 이것이 조선시대 사행길 일반 패턴이었다. 삼사가 붙어다니면 쌈박질밖에 더 하겠는가? 암튼 서장관 역시 넘버3이기는 했지만, 고위공무원단이라 전용 차가 배정되었으니, 그.. 2024. 3. 8.
[마질차] (4) 형수가 되었을 여인을 노리는 시동생 그때 태손太孫 소명전군昭明殿君이 이미 태어난 상태였고, 무열제는 (며느리인) 자의慈儀의 현숙함을 매우 아꼈다. (27세 흠돌欽突 전) 그때란 26세 풍월주인 진공이 흠돌한테 풍월주 자리를 물려준 때다. 이때가 656년 태종무열왕 재위 3년째다. 따라서 이로 보면 문무왕 김법민과 그의 정비 자의 사이의 맏이인 소명태자는 656년 혹은 그 직전에 태어났다. 소명을 전군이라 부르는 까닭은 아직 정식 왕자 혹은 태손으로 임명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전군은 정식 왕자보다는 한 등급 낮은 왕의 아들을 지칭하는 호칭이다. 이 두 가지 증언과 삼국사기 김흠운 열전을 종합할 때, 여기서 일어나는 일대 의문이 있다. 앞서 보았듯이 김흠운은 655년 백제와의 조천성 전투에 출전했다가 장렬히 전사했고, 그때 관위가 어느 정도.. 2024. 3. 8.
골동상이 가져와 구입한 이화여대박물관 소장 국보 청자 1946년 4월 1일, 인천시립박물관 개관과 더불어 만 27세에 그 초대 관장으로 복무한 이경성은 1954년 3월 31일, 36세에 그곳을 사임하고서는 활동 무대를 인천에서 서울로 옮긴다. 그 자신의 이력서에는 이 무렵 홍익대 연세대 한양대 서바벌예대, 수도여사대, 덕성여대를 전전한 보따리 강사 시절로 묘사하거니와, 이로 보아 무슨 뚜렷한 대안이 있어 관장직을 사임한 것만은 아닌 듯하다. 왜 사임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가 회고록에는 거의 드러나지 아니하는데, 외압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심증을 강하게 준다. 이러한 세월 속에서 인천이 고향인 나는 여러 가지 일을 벌일 수 있었는데 서울에 있던 친구들이 그만큼 인천을 위해 봉사하였으면 되었지 그만 올라와서 전국적인 바탕에서 일을하고 미술 평론가로서의 길을 .. 2024. 3. 8.
미술사가 석남石南 이경성李慶成(1919~2009)의 학적 편력 대한민국 제1호 공립박물관인 인천시립박물관 초대관장이며 이화여대 교수와 홍익대 교수를 거쳐 훗날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하는 그의 회고록 겸 수필집인 《어느 미술관장의 회상》(시공사, 1998, 2 초판1쇄) 에서 저자 스스로가 밝힌 이력을 정리한다. 다만 이 이력이 백퍼 팩트라고는 확신할 수는 없다. 기억 착란이 있을 수 있고 분식 또한 없다 장담해서도 안 된다. 함에도 식민지시대, 특히 그 중기에 태어나 태평양전쟁기 무렵에 대학생활을 보낸 인텔리겐차 전형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의 이력은 주시해야 한다. 이에 의하면 그는 1919년 2월 17일(음력인지 양력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아버지 이학순과 어머니 진보배의 장남으로 인천 화평동 37번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본래 유성에서 터전을 삼았다. 그러다가.. 2024.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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