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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2416

날발捺缽, 계절별로 달리하는 거란의 황제 거둥 오래다기 보다는 질긴 역사를 자랑하다 야율아보기 시대에는 완연한 정치체로 성장함에 따라 요遼, 혹은 그네들 스스로는 대요大遼라는 왕조 명으로 칭하기도 하면서 그 자체 국가로서 혼용하지만, 거란은 이 국가 체제로 접어들어서도 그 이전 유목 특성을 버리지 않았으니, 그 유목하는 성격을 현격히 드러내는 지점이 황제들이 계절별로 보내는 지점이 따로 있다는 점이다. 유목하는 족속과는 달리 정주定住하는 성향이 강한 데서는 그 군주가 상거하는 집이 있어 이를 궁宮이라 하고, 그 궁이 상거하는 집이 되며, 아주 가끔씩 출타를 하기도 하니, 이 출타를 순행巡行 혹은 순수巡狩(巡守라고도 한다)라 하거니와, 이 출타 때 이용하는 집을 걸어다니는 궁궐이라 해서 행궁行宮이라 하고, 가다가 잠시 머무는 데라 해서 행재소行在(所).. 2024. 3. 11.
간에 붙었다 쓸개 붙었다 거란을 갖고 논 서하 송과 거란을 사이에 둔 고려의 양다리 외교를 일러 실리외교라 하며 그것을 지금의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는 소리가 개소리임을 계속 주장하거니와, 그래 설사 그렇다 해도 고려는 동시대 서하에 견주면 암것도 아니어서, 서하는 거란과 송을 들었다 놨다 하며 곶감 빼먹듯 좋은 것만 다 빼먹었다. 요사遼史 권107 열전 제45가 이국외기二國外記라 해서 거란이 교유한 이웃 나라 중에서도 고려와 서하西夏 두 왕조를 특별 취급했다 함은 이미 이야기했거니와, 이 이국 열전에 드러난 서하의 쥐새끼 같은 행태를 추려본다. 애초에 서하는 宋을 섬겼으니, 그에 대한 급부로 송은 그 왕한테다가 송나라 황가 성씨인 조씨趙氏성을 하사한다. 그러다가 요나라 성종聖宗 통화通和 4년(986)이 되자 그 왕 조계천趙繼遷이 송을 배반하고 처음으.. 2024. 3. 11.
[귀주대첩 이후] (1) 파탄난 양다리 외교 대략 30년간 파국을 맞은 고려-거란 관계가 1019년 2월 귀주대첩을 고비로 일단락하면서 두 왕조는 급격히 외교관계를 회복하니 이는 곧 고려와 宋 관계의 재편을 의미하기도 했다. 거란과의 전쟁이 한창 진행되는 와중에 고려는 거란과의 국교 일체를 단절하고서는 일방적으로 송의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종주국을 송으로 바꾼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이제 이런 임시방편도 끝낼 수밖에 없었다. 고려는 귀주대첩이 있는지 대략 1년 반 정도가 지난 현종 11년, 1021년 6월에 한조韓祚를 우두머리로 삼은 사절단을 송에 보낸다. 이 일이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는 遣韓祚如宋, 遣韓祚如宋, 謝恩, 곧 한조를 송에 보내어 사은謝恩했다 해서 대단히 무미건조하게 적혔고, 이듬해 현종 12년, 1022년 5월 병자일에는 한조가 귀국.. 2024. 3. 10.
[마질차] (7) 마질차 엄마는 김유신의 딸 김유신 자식은 삼국사가 삼국유사에 그 실체가 어느 정도 공개되지만 아들만 실명 공개했을 뿐이요 특히 전자에서는 네 딸을 두었다 했지만 그 넷은 이름도 없고 당연히 행적도 없다. 예서 드는 의문. 김유신 정도 되는 아버지 딸들이 평이한 삶을 살았겠는가? 한데 화랑세기와 상장돈장에는 그 네 딸 이름만이 아니라 그 행적 또한 비교적 소상히 보이는데 예상대로 간단한 삶을 살지는 않았다. 그 네 딸 이름을 진광晉光 신광信光 작광酌光 선광善光이라 해서 첫 부인 령모令母. 소생이라 밝힌다. 이들은 기존에 알려진 김유신 장남 삼광三光과 더불어 모조리 光을 돌림자로 썼다. 이들과 달리 김유신이 환갑에 취한 지소공주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들은 노자의 별칭인 장이長耳만 빼고선 원술元述을 필두로 모조리 元자를 돌림으로 쓴다. .. 2024. 3. 10.
요사遼史 야율팔가耶律八哥 열전 요사遼史 권72 열전列傳 제10 야율팔가耶律八哥는 字를 오고린烏古鄰이라 하며 오원부五院部 사람이다. 어려서 총명하고 책은 한 번 읽으면 그 자리서 암송했다. 통화統和 연간에 대대로 업을 닦아 본부本部(오원부) 관리가 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승진하여 갑살월閘撒狘이 되었다가 이내 추밀원시어轉樞密院侍御로 옮겼다. 송나라 장수 조삼曹彬과 미신米信이 연燕을 침입하자 팔가는 호종하여 공을 세우고 상경유수上京留守로 발탁되었다. 개태開泰 4년(1015), 초치되어 북원추밀부사北院樞密副使가 되고 조금 있다가 동경東京을 유수留守했다. 7년(1018)년, 上이 명하여 동평왕東平王 소배압蕭排押帥한테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케 할 적에 팔가八哥는 도감都監이 되었다. 개경開京에 이르러 크게 약탈하고 돌아오는 길에 다하茶河와 .. 2024. 3. 10.
[마질차] (6) 김유신의 조카이자 사위 김흠돌 신라가 일통삼한을 달성하던 무렵 7세기 중후반 신라사에는 흠欽이라는 글자를 선호하는 이름이 유행한다. 김유신 동생 김흠순金欽純(흠춘欽春이라고도 한다)이 있고, 역시 군사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내다가 신문왕 즉위 원년 반란 혐의로 처단된 김흠돌金欽突이 있으며, 또 655년 백제와의 조천성 전투에서 8등 사찬이면서 낭당대감으로 출전해 장렬히 전사한 김흠운金欽運이 있다. 이들 관계를 결론으로 앞서 말한다면 김흠돌은 김흠순의 조카이며, 그런 흠돌과 흠운은 아버지가 같고 엄마가 다른 동부이모同父異母 형제다. 물론 이런 내용, 곧 저들의 관계는 기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는 보이지 아니하며, 화랑세기와 그 족도族圖인 상장돈장上章敦牂에서 드러난다. 김흠순이야 그의 친형이 김유신이니, 그 계보에 대해서는 볼짝이 없지.. 2024.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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