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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2287

구동조瞿同祖 《중국법률과중국사회》 부모 말 안들으면 말라리아 응징 구동조(瞿同祖) 《중국법률과중국사회中國法律與中國社會》 번역 :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중국사 전공 제1장 2절 부권 09 청대의 판례를 살펴보면, 부모가 신고한 사건 중 다수는 비교적 사소한 것으로 통제에 따르지 않거나 말대꾸를 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평소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여 모친의 가르침을 듣지 않아 고발되어 먼곳으로 끌려갔다. 어떤 사람은 술에 취해 말썽을 일으켜 매번 주의를 받았음에도 듣지 않아 직예直隸에서 광서廣西로 끌려갔다. 봉양을 소홀하게 해서 그런 경우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가출한 뒤 2년 동안 집을 비운 채 부친을 모시지 않았다가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서남지역의 병사로 충원되었다. 허다한 예로 절도가 있다. 어떤 사람은 부친의 양식을 몰래 팔았다가 들켜 자백하고는 사천四川에서 광동廣東으.. 2020. 1. 20.
내가 찾은 유일한 피임방식 질외사정 [신간] 우리는 피임을 모른다 2020-01-16 11:02 나는 언제나 콘돔이 대표하는 근대적 의미의 피임도구가 상륙하기 전 이 땅의 피임避姙 방식 혹은 도구가 궁금했으니 여직 그 의문을 풀지 못했다. 그것을 명시 혹은 암시로 보여주는 흔적을 좀체 찾지 못한 까닭이다. 현재까지 그나마 편린으로 잡힌 것이 고려 태조 왕건과 나주오씨 이야기라..이건 고려사에도 저록된 유명한 이야기라 남자가 배설을 밖에다 하는 방식을 피임 방법으로 유추한다. 질밖 ejaculation이 얼마나 전통시대 피임방식으로 선호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암튼 이를 통해 전통시대 우리네 조상 피임방식 일단을 본다. 예서 관건이 기생들이다. 이 기생들한테 임신은 심대한 생업의 장애다. 저들이 모두 왕건과 장화왕후 방식을 썼다고는 보지 .. 2020. 1. 19.
구동조瞿同祖 《중국법률과중국사회》자식의 절대 생사여탈권은 부모한테 구동조(瞿同祖) 《중국법률과중국사회中國法律與中國社會》 번역 :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중국사 전공 제1장 2절 부권08 더욱 중요한 것은 부모가 자녀의 처벌과 사면에 절대적 결정권을 지녔다는 점이다. 자유 박탈 여부, 집행과 그 이후 형벌의 면제까지 모두 부모의 의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법률은 단지 범위와 방법을 정하고 집행을 대리해줄 뿐으로 위탁 받아 결정하는 기구에 불과하다. 형식적으로는 법관이 판결하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법관에게 판결을 위임한 부모가 결정하는 것이다. 법률이 부모의 친권을 인정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부모가 자손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합법적 권력으로 엄격히 말하면 멀리 보내달라고 신청해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부모가 형벌을 면제해 주는 권리 또한 석방을 청구해서 시작된.. 2020. 1. 19.
과거제가 없고, 내시가 없는 일본 중국이나 한국사에 견주어 일본사의 특질로 첫째 과거科擧가 없었고 둘째 유너크 eunuch 라 하는 환관宦官 내시內侍가 없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과거가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현량賢良이나 효렴孝廉을 추천한 것도 아니니 일본은 세습으로 뻗어갔다. 환관 내시가 없었으니, 매양 최고 권력자는 시녀들 품에서 놀게 된다. 이것이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이라 하지만, 일본이 한국 중국과 차별하는 큰 대목이었다. 2020. 1. 18.
구동조瞿同祖 《중국법률과중국사회》 가족과 부모는 영원한 속박 구동조(瞿同祖) 《중국법률과중국사회中國法律與中國社會》 번역 :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중국사 전공 제1장 2절 부권 07 석방하여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봉양할 사람이 없어진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서다. 따라서 자손은 풀려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모셔야 했다. 한 번 풀려난 뒤 다시 부모의 뜻을 거슬러 부모로부터 고발당하면 가중처벌을 받아 신강新疆으로 보내 관병의 노예로 삼았다. 모셔야 할 분들이 모두 사라지면 석방하여 집으로 돌려보낼 필요도 없었다. 우연히 실수로 잘못을 저지른 자가 다시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았다면 부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애통해 하는 모습을 살펴 총독이나 순무, 장군이 형부에 보고하여 심사하는 절차가 있었다. 어떤 사람은 부모의 고발로 수감된 뒤 부모의 사망 소식을 듣고 .. 2020. 1. 18.
벌써 11주년 용산참사, 그날의 비극을 기억하며 [순간포착] 용산 참사, 그날의 안타까운 기억송고시간 | 2020-01-18 08:00참사 현장에는 거대한 주상복합빌딩 건축중 식민지시대 이른바 강제동원을 한창 인터뷰할 적에 철도라는 관점에서 하나 이상한 점은 그네들 뇌리엔 서울역은 전연 없다시피 하고, 오직 용산역만 남았다는 점이 나로서는 특이했다. 다들 하는 말이 용산역에서 기차를 타고는 저 머나먼 남양군도며 버마전선으로 갔다고 했다. 꼭 그래서는 아닐 것이로대, 그런 용산역 역사를 증언하는 유구한 유산 중 하나가 그 용산역 전면 유곽이었다. 그랬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용산역전엔 유곽 거리가 있었다. 이곳이 개발된다 했을 적에 그것이 없어질 것임을 알고는 기록이라도 남겨놔야 한다고 생각해 언제적인지 사진기 들고 촬영을 나갔다가, 가뜩이나 그런 데 민.. 2020.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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