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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2287

구동조瞿同祖 《중국법률과중국사회中國法律與中國社會》 족장의 권위 구동조瞿同祖 《중국법률과중국사회中國法律與中國社會》 번역 :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중국사 전공 제1장 2절 부권23 사위를 불러 돌봐달라 하더라도 일족 가운데서 양자를 세워 제사를 받들게 해야 한다. 그러나 양자를 들이기 전에 사망하면 족장이 일족 가운데 한 사람을 지명해 뒤를 잇게 한다. 법률도 “족장이 규정에 따라 논의하여 세운다”고 했다. 일족의 법규를 어기거나 중재에 불복한 족인이 있으면 족장은 징벌권을 행사한다. 대다수 일족은 각기 규약을 갖고 있다. 일족의 규약 가운데는 성문화한 것도 있는데, 정씨규범鄭氏規範은 가장 잘 알려진 예다. 어떤 가문은 규약과 구체적 조목은 없더라도 대개 전통적 금기가 있어 문풍門風을 파괴하거나 조종祖宗을 욕되게 하는 행위는 일족에서 용납하지 않았다. 종종 형법을 위반.. 2020. 1. 26.
구동조瞿同祖 《중국법률과중국사회中國法律與中國社會》가장에서 족장으로 구동조瞿同祖 《중국법률과중국사회中國法律與中國社會》 번역 :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중국사 전공 제1장 2절 부권22 일족이 반드시 함께 사는 생활공동체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대개는 가족별로 따로 산다. 그렇기에 가족 내 일은 해당 가족의 가장이 다스리며 족장은 간여하지 않는다. 족장이 관장하는 일은 가족과 가족 사이에서 일어나는 공동의 사안이다. 예로 족전族田, 족사族祠, 족학族學의 관리, 족전의 수익배분 등을 들 수 있다. 족장은 종교적 역할도 지녀 족제族祭를 주재한다. 육구령陸九齡(1132~1180) 형제는 매일 새벽마다 가장이 자제들을 거느리고 선사先祠를 배알했다. 비록 일반적인 가족의 경우에는 매일 사당을 찾지 않았지만 세시 제사를 주관하는 것은 족장이었다. 통상적으로 가족 사당의 개별 제사는 가.. 2020. 1. 26.
구동조瞿同祖 《중국법률과중국사회中國法律與中國社會》가장 족장으로 옮겨간 종법질서 구동조瞿同祖 《중국법률과중국사회中國法律與中國社會》 번역 :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중국사 전공 제1장 2절 부권21 또한 종자宗子의 도리는 형의 도리이다. 종법제도의 기본은 형이 동생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후대에는 이 의식이 사라지면서 이런 질서도 사라졌다. 여하튼 형은 동생을 다스리는 힘을 잃었다. 어떤 집안이건 일가의 통치자는 부친이지 형이 아니다. 종법질서가 사라진 후 가장과 족장이 이를 대체했다. 가장은 소종의 족장과 같다. 일가 혹은 한 지파의 주재자이다. 종손은 대종의 종자와 같아 일족을 주재한다. (단 어떤 경우에는 가장과 종손의 구분이 엄격하지 않다. 광의의 의미에서는 족장을 가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역사상의 용어로 보면 족장이란 말은 비교적 후대에 생긴 것이며 상대적으로 통속적이다. 육구.. 2020. 1. 26.
구동조瞿同祖 《중국법률과중국사회中國法律與中國社會》 종손, 종법의 으뜸 구동조瞿同祖 《중국법률과중국사회中國法律與中國社會》 번역 :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중국사 전공 제1장 2절 부권17 이처럼 종손은 일가에서 수월적 지위를 누렸다. 따라서 종손과 종부는 최고의 예우를 받았다. 하순賀循이 ”종손을 받드는 것은 상례“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예기》에 ”적자와 서자는 종손과 종부를 섬긴다. 비록 부유하고 지위가 높다해도 종손의 집에서는 함부로 이를 내세울 수 없다. 비록 여러 대 수레가 뒤를 따랐다 해도 밖에 두고 단촐한 차림새로 들어간다. 자제가 기물, 의복, 침구를 선물받았을 때는 반드시 가장 좋은 것을 바치고 그 뒤에 다음 물건들을 사용한다. 종손의 지위를 어느 정도 높았는지 상상케 한다. 종법은 본디 봉건귀족의 친족조직이다. 봉건제도가 파괴되자 종법조직.. 2020. 1. 26.
유희석을 째려보는 이국종 [순간포착] 묘한 시선으로 유희석 바라보는 이국종! 2020-01-25 08:00 최근 불거진 양측의 첨예한 갈등 예고했나 이번주 순간포착은 애초엔 2011년 아덴만 여명작전을 생각했다가 이국종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발생 시점이 이번주였으니 다만 이 작전을 생생히 증언하는 사진들이 우리 자체 촬영이 아니라 해군 제공이라 맘에 걸렸다. 다만 이 작전과 뗄수 없는 인물이 이국종이라, 그에서 중상한 석해균 선장을 살려냄으로써 그는 이른바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으니 그런 그가 근자 다시금 뉴스메이커로 등장하는 까닭에 다행히 아데만 관련 자료를 뒤지니 최근 갈등의 당사자인 유희석 아주대병원장과 같이 기자회견을 하는 몇 장면을 포착했다. 앞 사진은 개중 하나라 이것만으로는 둘이 자리를 함께했다는 것 말고는 드라마.. 2020. 1. 25.
1902년생 안호상 자서전, 1901년생 양사성 회고록 근자 회고록 두 편을 독파했다 개중 하나가 안호상 선생 자서전이라 이 양반 양반 사족에 1902년 1월 출생이라 부잣집인 까닭에 집에서 돈 훔쳐 야반도주하다시피 해서 서울 유학하고 그걸로 만족치 못하고는 중국으로 들어가 전전하다 상해로 가서 독일어학교 나오고 다시 그걸로는 성이 안 찬다 해서 중국여권 맹글어 배타고 유럽으로 들어가 독일 명문 예나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종교도인 그는 귀국해서는 인촌 김성수를 면담하고는 보성전문 교수가 되었고 그 길에 춘원 만나 모윤숙 시집을 보고는 그에게 반해 고향에 처자식 있는데도 버리고 모씨와 재혼해서 딸을 낳았으며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곤욕을 치렀는가 하면 경찰에 불려가 열라 터졌고 해방 정국에선 서울대 교수로 갔지만 나찌즘 신봉자 우익이 웬일이냐.. 2020.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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