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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2896

백제를 주무른 사탁씨[사택씨] 기사입력 2009.01.20. 오후 5:26 최종수정 2009.01.20. 오후 6:51 사탁씨 백제를 주무르다 최고위직 독점에 왕비 배출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백제는 부여에서 남하한 온조가 세운 까닭에 왕은 '부여씨'가 독점했지만 정작 그 나라를 주무른 것은 '사탁씨'였을까? 점점 그런 형국으로 백제사는 빨려드는 중이다. 익산 미륵사 석탑을 해체하다가 발견된 백제 무왕시대 사리장엄구에 포함된 금제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에 의하면, 이 절은 무왕의 왕후王后가 창건했으며, 그 왕후는 좌평佐平 사탁적덕沙乇績德의 딸이다. 사탁적덕에서 '사탁'은 요즘의 제갈씨諸葛氏나 남궁씨南宮氏처럼 두 글자를 사용하는 복성復姓이며, 적덕績德은 이름이다. 이런 명문이 공개되자 종래 무왕의 왕비로 알고 있던 신라 진평왕의.. 2020. 12. 7.
영흥도 출수出水 황칠은 물감 아닌 약물! 2014년 9월 19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공개한 영흥도선 출수 유물 중 황칠 저장 도기다. 저 안에 든 물품을 분석했더니 황칠로 나왔다. 조사단은 저 황칠을 도료로 추정했거니와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으나 약물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건 저 포장품을 보면 약병으로 판단하는 까닭이다. 이런 황칠이 2006년 경주 첨성대 인근 신라시대 유적에서도 드러났거니와 것도 안료 혹은 물감이 아닌 약물이다. 모든 안료는 약물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2020. 12. 6.
설원랑, 한치 변함없던 미실의 충신이요 남자 (설원)공은 건원建元 14년(549)에 나서 건복建福 23년(606) 7월에 卒했다. 그때 미실美室 궁주宮主가 이상한 병에 걸려 여러 달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공이 밤낮으로 옆에서 모셨다. 미실의 병을 자신이 대신하겠다고 밤에는 반드시 기도하였다. 마침내 그 병을 대신하였다. 미실이 일어나 슬퍼하며 자신의 속옷을 함께 넣어 장사를 지내며, ‘나 또한 오래지 않아 그대를 따라 하늘에 갈 것이다’고 하니 그때 나이 58세였다. (화랑세기 설화랑전) 설원랑薛原郎은 설화랑薛花郞이라고도 하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모두 보인다. 그가 바로 원효의 직계 선조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최초의 화랑이라는데 저 화랑세기가 발견됨으로써 그가 실제로는 7세 풍월주다. 다만 540년 제정된 화랑이 폐지되었다가 부활했을 적에 그.. 2020. 12. 6.
《화랑세기》에 보이는 진흥왕 말년~진지왕 시대 화랑과 원화, 그 왔다리갔다리 혼란상 - 562년 5세 풍월주 사다함 사망, 6세 풍월주 세종 취임 - 568년 원화源花 부활, 29년 만(540년 기준), 미실美室 원화 취임, 연호 대창大昌 개원 - 572년 홍제鴻濟 원년 3월, 동륜태자 보명궁 개한테 물려 사망, 미실 연루, 원화 4년 만에 폐지, - 572년 풍월주 세종 재취임. 세종, 설원랑에게 풍월주 양위(양위연대는 불명, 아마 572일듯) - 576년 진흥 사망, 진지 즉위와 더불어 화랑 분열, 호국선護國仙 문노파가 독립해 설원랑의 운상인파雲上人派와 대립 - 579년, 진지 폐위 직전 진흥왕비 사도태후가 두 파를 통합, 원화 부활, 미실 원화 재취임. 미실이 설원랑을 다시 풍월주로 임명, 곧이어 문노에게 풍월주 양위 *** 이것이 화랑세기에 보이는 진흥왕 말년과 진지왕 시대에 걸.. 2020. 12. 5.
이사부異斯夫에 의한 우산국 정벌, 어찌 봐야 하는가 1. 고려시대 여진 침투 기록에서 유추하는 신라시대 동해안 해로海老 내가 연구사 검토할 때까지만 해도 이 대목이 집중 부각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어떠한지 모르나, 나는 언제나 말했듯이 신라 지증왕 시대 이사부異斯夫(일명 태종苔宗)에 의한 우산국于山國(지금의 울릉도) 정벌 비밀은 고려시대 여진족에서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고려시대 여진이 한반도를 침략하는 통로는 언제나 동해안 해로였다. 고려시대 동해안 피침탈 기사를 보면 언제나 여진은 배를 타고 나타났다가 배를 타고 사라진다. 그래서 그 지역 지방관 업적을 나열하는 데는 언제나 여진 적선 몇 척을 나포했다는 기록이 빠지지 않는다. 그들의 침투 지역에 주된 지역은 경주였다. 이들이 자주 찾은 곳은 경주였다. 그들이 경주를 침략하는 통로가 바로 해로다. 이는.. 2020. 12. 4.
망국의 제1 원흉은 고종 망국의 제1 원흉, 고종이다. 그의 이런 책임을 면탈하는 것이 마치 식민사관 청산인 듯이 주장하지만 첫째, 그것이 결코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첩경일 수가 없고 둘째, 그것이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일도 아닐 뿐더러 셋째, 그렇다고 해서 그의 책임이 면탈되는 것도 이 아니다. 망국의 모든 책임이 고종 한 사람에게 귀결하지는 않는다 해도 상당한 책임에서 그는 자유로울 수 없고 그래서도 아니된다. 덕수궁을 경운궁으로 돌려야 한다는 주장, 그 뒤켠에는 이런 책임 면탈론이 있다. 그렇게 책임이 면탈한 자리에 강포한 일제가 자리잡는다. 순진한 처녀를 강포한 군인이 강간했다고 한다. (2011. 12. 3) *** 마침 저 무렵에 대한제국과 고종, 그리고 그 왕비 민씨를 구국의 영웅처럼 치받들고자 하는 움직임이 서울대 국.. 2020.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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