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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2944

이름만 덜렁한 윤보선 명함 조선시대 문집이나 중국문집을 보면 모르는 사람을 찾아갈 적에 명함을 주고서 기다렸다는 표현이 많다. 이 명함이 어찌 생겨먹었는지 나는 본 적이 없다. 실물로 남은 명함으로 구한말인가 외교관으로 나간 관리 명함을 본 적이 있을 뿐이다. 이 윤보선 명함은 그가 어느 시절에 사용한 것인지를 짐작할 구석이 없다. 한자 이름 尹潽善 옆에 한글표기만 붙였을 뿐 뒷면은 아예 백지상태라 이것이 당시 방귀께나 낀다는 사람들 명함 일반이었는지는 모르겠다. 2021. 2. 4.
굴포운하, 태안반도를 절단하고자 한 욕망 굴포운하掘浦運河는 한마디로 태안반도를 섬으로 만들고자 한 대역사였지만, 지난 530년간 10여 차례 시도 끝에 결국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굴포역사는 안흥량 인근 해저 발굴과 뗄 수가 없거니와, 이 해저는 바닷속 경주로 최근 각광받는 중이다. 안흥량은 지금은 安興梁으로 쓰거니와, 梁은 이미 신라시대에 '돌'로 읽었다는 흔적이 삼국유사에 보이거니와, 물길이 각중에 좁아지고 거세지는 여울목을 말한다. 그런 까닭에 이곳은 그 전에는 배가 통과하기 힘든 혹은 곤란한 곳이라 해서 난행량難行梁이라 일컬었다. 그리 바닷길이 험하면 태안반도를 우회하는 해로를 이용하면 될 것 아니냐 하겠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경제 비용과 시간 때문이었다. 나아가 당시 조운선이 대표하는 근해 선박들이 원해를 버텨낼 재간도 없.. 2021. 2. 3.
대한제국 황제의 예복 고종황제와 황태자가 양관 앞에서 촬영한 이 사진이 대한제국기 대원수 예복으로 생각되는 옷이고 이때 착용한 모자가 피켈하우베입니다. 화질이 좋은 사진으로 보면 소매에 人자형 장식 줄에 대원수 11줄, 원수 10줄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을사늑약 이후 원수부가 해체되고 1905년에 바로 이 예복을 안입었는지는 확인이 아직 안되었고 1907년이 되면 확실히 원수부의 예복 형태가 아닌 육군 대장복을 입은 순종의 사진이 등장합니다. 순종의 사진에서 보면 모자 윗면이 편평한 형태이고 상의에 人자 장식이 9줄로, 대원수가 아닌 육군대장복입니다. 그러니까 요지는 순종은 황제로서 피켈하우베를 못 착용한 겁니다. 그런데도 순종의 즉위기념장, 바로 앞의 즉위기념우표, 기념엽서, 또 우체국 소인등에서 대원수의 모자를 중요한 모.. 2021. 2. 3.
김재원은 왜 천마총 황남대총 발굴을 반대했던가? (2) 정부의 심장을 겨눈 전임 국립박물관장 중앙일보 1974. 11. 18 | 종합 4면 기고문 중 한 대목이다. 지금 우리의 손으로 저 고분을 파헤쳐서 그 안에서 보물이 나왔다고 신문이 떠들고 독자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킴으로써 우리가 얻는 바가 과연 무엇일까. 경주의 고분은 학자들에게는 벌써 그렇게 학적 흥미를 느끼지 않게 된지 오래다. 왜? 경주 고분의 구조와 부장품은 이미 국내외에 잘 알려진 까닭이다. 일제 때인 1920년대에 우연히도 발견된 금관총은 그 규모나 부장품으로 보아서 제1급의 고분이었다. 그러나 그 고분이 발견될 때까지는 분의 형태가 완전히 파괴되어 그야말로 조그마한 잔해만이 지상에 남아있어 과연 고분인지조차 모를 정도였다. 그런데 도로확장공사 중에 그 부장품이 드러남으로써 관계사들이 당황하여 사후처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2021. 2. 2.
천마총 황남대총 발굴은 이맹희 아이디어였다 현재 보문단지를 그때 만든 다음 그후 조금씩 건물을 더 지어서 지금처럼 조성한 것이다. 원래 정부의 제안은 보문단지 호숫가에 도로를 만들고 건물을 전부 산쪽으로 붙여서 짓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경우 호텔 등에서 호숫가로 가려면 찻길을 건너야 할 뿐더러 결국 호수와 멀리 떨어진 건물 일대의 땅은 쓸모가 없어진다. 이때는 내가 고집을 피워서 결국 지금대로 호숫가에 건물을 짓고 길을 건물 밖으로 내도록 했다. 호수를 다 파고 나서는 또다른 문제가 생겼다. 그 호수가 단순한(이상 238쪽) 위락용 호수가 아니라 농업 용수를 제공하는 호수이다 보니 정작 봄, 여름철이 되면 농사 짓는데 쓰느라 물이 다 빠져나가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위에 다시 하나의 댐을 더 만들어서 물을 저수하기로 했.. 2021. 1. 31.
유신정권의 관광산업육성과 호텔 신라, 그리고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 원래 서비스업에는 아버지나 나나 별로 내키지 않았는데 관광산업을 위해 정부에서 큰 기업들은 다 호텔을 하나씩 지으라고 해서 우리는 당시 영빈관이 있던 장충동 일대를 매입해서 호텔을 세우기로 했다. 그 호텔은 가능하면 삼성에서 하지 않으려고 고의적으로 공사를 늦추다가 '78년 임페리얼에서 신라로 이름을 바꾼 후 완공되었다....요즘도 나는 경주에 가끔 가보는데 그 역시 당시 박대통령의 지시로 개발된 것이다. 물론 지금의 경주는 발굴 전의 모습보다는 훨씬(이상 236쪽) 더 훌륭하다. 그러나 그 역시 민간인들에게 처음부터 다 맡겼더라면 더 좋은 상태로 변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지금도 경주 불국사 일주문 입구의 건립비에는 '박대통령의 높은 뜻'과 더불어 당시 경주 개발에 참가한 기업과 대표자의 이.. 2021.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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