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역사문화 이모저모2492 땅딸보에 못생긴 강감찬, 최수종은 아니었다 한동안 강감찬 하면 최수종을 떠올릴 것이다.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실제의 강감찬은 하이틴스타 원조에 해당하는 최수종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멀었다. 역사는 아주 특별한 경우에 외모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데 첫째 열라 잘 생기거나 둘째 열라 못생길 때 딱 두 가지 경우가 있을 뿐이다. 우리 감찬이 형도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외모가 흔적으로 남았다. 더 불행하게도 전자가 아니라 후자였다. 고려사 권94 열전列傳 권 제7 제신諸臣 항목이 정리한 강감찬 열전 한 대목이다. 邯贊性淸儉, 不營産業. 體貌矮陋, 衣裳垢弊, 不踰中人. 그렇게 어려운 말은 없다. 대강 이런 뜻이다. 감찬은 성정이 청렴하고 집안 일은 돌보지 않았다. 외양은 왜소하고 남루하고, 옷가지는 더럽고 낡아서 보통 사람보다 낫지 않았다. 그랬다. 감찬이.. 2024. 2. 1. 목은 이색을 어찌 볼 것인가? 고려사 전공 A 교수의 목은 이색에 관한 책을 붙잡고 연짱 두세 시간 동안 본문 280쪽 중 120쪽을 독파했다. 중간 감상을 적는다. 1. 이색은 최치원의 복사판이다. 필자가 말하는 이색은 삶이 내가 일필휘지로 탈초하여 신라사학보인가 한국고대사탐구를 통해 공간한 '황금방 최치원의 비애' 그 복사판이다. 최치원이 그러했듯이 이색 역시 화려한 금뱃지를 무기로 세상을 경영하고자 고국에 돌아왔지만, 세상이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경륜이 아니라 외교문서 수발에 지나지 않았다. 최치원은 쏟아지는 중놈들 전기 써달라는 청탁을 견디지 못하고 가야산으로 들어가서는 아무도 몰래 죽어버렸다. 마찬가지로 화려한 옥스브리지 하버드예일 장학생 출신 이색에게 권력이 요구했던 것은 너는 외교 문서나 짓고, 그거 데스킹이나 하고 자빠.. 2024. 2. 1. [강동육주를 심판한다] (1) 거란 중심주의 시각 고려거란전쟁에서 이른바 강동육주江東六州가 언제나 매개 변수로 등장한다는 사실을 지적했거니와, 하지만 이 강동6주라는 말은 근대 역사학이 만들어낸 데 지나지 아니하고, 무엇보다 고려 측 기록, 곧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를 보아도 州는 가당치도 않고, 변방 군사 요새 지역이라는 의미가 강했으니, 그보다는 성城이라는 개념으로 치환해 이해하는 편이 옳다. 더구나 내용을 뜯어보면 6주가 아니라, 거란에서 할양받은(엄밀히는 거란 묵인 하에 고려가 여진을 정벌하고 얻은) 땅에다가 8개 성을 설치한 것으로 문헌에는 보인다. 앞서 나도 지적했듯이 이 강동육주라는 말이 여러 모로 당시 두 나라 사이 국제관계를 설명하는데 편리한 것만은 틀림없다. 그렇다 해서, 곧 편리하다 해서 퉁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근대.. 2024. 2. 1. 윤관9성과 자본, 식민지 경영을 생각한다 고려사 권58 지志 권 제12 지리地理 동계東界 함주대도독부咸州大都督府 선화진宣化鎭 항목을 보면 이른바 윤관 9성城에 대한 아래와 같은 기술이 있다. 옛날 역사를 살펴보면, 9성 땅은 오랫동안 여진이 기거하던 곳이다. 예종 2년(1107)에 원수元帥 윤관尹瓘·부원수副元帥 오연총吳延寵에게 명하여 병사 17만 명을 거느리고 여진을 쳐서 쫓아내고 군사를 나누어 그 땅을 경략하였다. (중략) 이에 여진은 그 근거지를 잃어 보복하기를 맹세하고 먼 곳의 추장까지 끌어들여 해를 거듭하여 쳐들어오니 우리 병사도 목숨을 잃은 자가 역시 많았다. 또 땅을 개척하여 이미 넓으니 9성 간 거리가 너무 멀어서 여진이 자주 울창한 수풀에서 매복하였다가 왕래하는 자를 노략질하니 국가에서도 병사의 조달이 많아져 전국이 소란스러워졌다.. 2024. 2. 1. 울릉도는 공도空島가 아니라 왕화王化 밖이었다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1539~1609) 시문집인 아계유고鵝溪遺稿 제3권 / 기성록箕城錄 ○ 잡저雜著에 수록된 울릉도설蔚陵島說이라는 논설이다. 울릉도는 동해 가운데 있는 섬으로, 육지와의 거리가 몇 백 리가 되는지 모른다. 매년 가을과 겨울이 교차할 즈음 흐릿한 기운이 말끔히 걷히고 바다가 청명할 때, 영동嶺東으로부터 바라보면 마치 한 조각 푸른 이내가 수평선 저편에 가로놓여 있는 것과 같다. 유독 진주부眞珠府가 이 섬과 가장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기 때문에 행인들 중 소공대召公臺에 오른 이들은 더러 이 섬의 숲과 묏부리의 형상을 명료하게 볼 수 있으니, 이로써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기성 사람들이 말하기를, “노루나 사슴, 갈대, 대나무 따위가 왕왕 바닷가 백사장에 떠밀려 오고, 이름 .. 2024. 1. 31. 쏜살 같은 도망길, 돌아올 땐 장가도 가고 느릿느릿 고려 현종 밤에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보름 만에 나주까지 줄행랑을 친 고려왕 현종 왕순. 따라오지도 않는 거란군을 피해 도망다니다, 돌아보니 거란군은 흔적도 없어 쑥쓰러워지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이젠 가오를 생각할 때였다. 1010년 1월 13일일 노령을 넘어 나주에 도착하고서는 거란군이 물러났다는 보고를 접하고는 맥이 풀렸는지, 아니면 이젠 온 김에 좀 쉬고 가야 한다 생각했음인지, 거기서 물경 8일이나 퍼질러 놀다가는 21일 을미乙未가 되어서야 행장을 꾸려 북상을 시작하는데 앞서 본 남행 도망길과 이제 시작하는 복귀하는 길은 조금 달랐다. 그만큼 여유가 많아졌기 때문이기도 하겠거니와, 이제는 민심을 다독일 때가 된 까닭이다. 도망길이 순행길이 된 희유한 케이스가 바로 현종의 피난길이었다. 귀경길에 오른 그는 첫.. 2024. 1. 31. 이전 1 ··· 185 186 187 188 189 190 191 ··· 416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