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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적, 족보, 일기 이야기 (역사인구학)616

소위 경화사족의 개념을 다시 써야 앞에서도 썼지만 해방 이후 우리나라는 향촌 사족들의 명망가 코스프레가 실상보다 매우 부풀려진 데다가, 경화사족의 권세와 힘, 그리고 비중이 지나치게 축소되어 조선후기 정국이 일당 독재로 가면서 서울에 살던 몇 안되는 사족이 권세를 누리며 오렌지족처럼 살던 족속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고, 지방의 명망가 사족들에 의해 서울의 몇 안되는 경화사족들이 포위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데그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일차사료를 조금만 뒤져봐도조선시대 내내 서울 사는 사족들의 힘과 비중은 가히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비교의 대상이 안 되는 정도의 차이인데 왜 경화사족이 몇 안 되는 서울 양반 집 부유한 자제들처럼 채색되어 있는지 모를 일이다. 서울은 당시 절대다수의 진사, 대과 급제자, 무수히 많은 .. 2026. 5. 23.
무과라 불만이었던 노상추 그러나 실상은..... 노상추일기는 유명하다.그리고 노상추가 문과로 나가지 못하고 무과급제자가 된 데 상당한 불만이 있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이렇게 대대로 사마시로 나간 자신이 무과로 간 데 불만이 많아 영남 지역은 차별받고 있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영남 지역 사림들이 중앙 정계를 농단하던 15-16세기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는데, 이 시점의 과거 급제자 등을 보면 특별히 영남지역이 차별받은 것도 아니고, 경상도 지역은 여전히 과거 급제자에 있어 전국 탑클라스였다. 그렇다면 노상추가 왜 이렇게 생각했는가를 보면, 그의 비교대상이 다른 향촌 지역이 아니라 서울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서울에 거의 모든 부와 권력, 심지어는 문무과 급제자들까지 모여 있기 때문에 향촌의 사족들은 문과가 문제가 아니라 무과도 제대.. 2026. 5. 23.
하타모토와 경화사족 (2) 사무라이가 몰린 에도, 무관들이 운집한 한성 앞에서 하타모토 8만기라는 이야기를 했지만, 이들 대다수는 에도시대 수도인 에도에 머물며 명분상 쇼군을 호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가족들 숫자만 헤아려도 인구가 상당히 될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참근 교대로 지방과 수도를 정기적으로 순회하며 사는 300 제후의 번저와 그 족속들이 에도에 살아가니이 인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도시민(조닌)까지 있으니 이를 다 합치면 백만 명이라는 인구가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 한성이라고 달랐을 것인가. 한 번 따져 보자. 한성부에 살아가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사족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앞에서 본 것처럼 문과 급제자 수나 진사 급제자 수를 보면 전체 40 프로 정도가 한성부 안에 살았으니 사실상 조선의 제대로 된 사족의 절대다수가.. 2026. 5. 23.
그 많은 경화사족은 다 어디로 갔을까 우리나라 경화사족-. 흔히 서인 독재가 시작된 조선후기에나 등장한 것처럼 역사책에는 써 놨지만앞에서 필자가 쓴 대로 우리나라 역사에서 수도 근방의 사족들이 절대 우위를 점하지 않은 시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경화사족이라는 것이 조선후기에나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오늘날 조선시대 선비 집안 하면 지방의 사족들이 하도 떠드는 통에 마치 우리나라 역사는 이들 향촌 사족들이 주도하고 좌지우지한 것 같이 보이고, 심지어는 몇몇 좀 잘 나갔다는 집안들이 자기들은 국반이니 도반이니 하며 보학하는 사람들 사이에 말들이 오가지만이런 분류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 우리나라 조선시대는 그 전 시기 내내수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바글 바글 모여 살았던 사족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전주이씨가 가장 우위를 점한 것은.. 2026. 5. 23.
하타모토와 경화사족 이야기 (1) 쇼군을 대면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 일본사에는 하타모토 8만기(旗本八万騎)라는 말이 있다. 하타모토旗本란 에도시대 사무라이 계급 사다리에서 최정점에 있던 이들로,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쇼군과 직접적인 주종관계가 맺어진 이들이 바로 하타모토와 번주 (영주)들이고, 번주에 소속된 번 사무라이들은 쇼군이 볼 때는 배신陪臣이 된다. 따라서 쇼군은 원칙적으로는 하타모토나 번주 정도나 되야 대면이 가능하지 번주의 신하인 배신들은 상대도 해주지 않았다. 에도시대 소위 말하는 300제후에 소속된 사무라이들은 쇼군이 볼 때 모두 배신들이었기 때문에, 쇼군이 직접 상대 할 만한 가격의 사무라이 숫자는 많지 않았다 할 것이다. 하타모토는 쉽게 말해 쇼군에 직속된 무사들이라 할 수 있다. 에도시대 대부분의 사무라이가 번주에게 소속된 사무라이였던 데 반해, 하.. 2026. 5. 23.
19세기를 달리 보는 법 이전에 쓴 것 같지만 필자는 18세기 중엽 영조 이후 19세기를 격변의 시대로 보며 이 시기는 암울하게 채색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18세기까지도 노비를 사역시키며 양반들이 대책없는 세월을 보이고 있어 누가 정체되었다고 이야기 해도 할 말 없을 조선땅에도 18세기 중엽이후영조라는 불세출의 군주가 다스리는 동안 격변이 시작되어 19세기가 되면 경천동지의 변화가 하루가 멀다하고 일어나기 시작, 그 흐름이 20세기를 넘어 21세기까지 오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밖에 나가면 귀족도 없고 평민도 없고 조상이 누군지도 모르고 우리 조상들은 전부 한 자리 하는 양반들이고 나는 그 후손이라 생각하게 된 것도 바로 18세기 이후 우리 사회가 겪던 긍정적 변화의 최종 종착점에 해당하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19세기 말 변.. 2026.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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