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에서 하타모토 8만기라는 이야기를 했지만,
이들 대다수는 에도시대 수도인 에도에 머물며 명분상 쇼군을 호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가족들 숫자만 헤아려도 인구가 상당히 될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참근 교대로 지방과 수도를 정기적으로 순회하며 사는 300 제후의 번저와 그 족속들이 에도에 살아가니
이 인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도시민(조닌)까지 있으니 이를 다 합치면 백만 명이라는 인구가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 한성이라고 달랐을 것인가.
한 번 따져 보자.
한성부에 살아가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사족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앞에서 본 것처럼 문과 급제자 수나 진사 급제자 수를 보면
전체 40 프로 정도가 한성부 안에 살았으니 사실상 조선의 제대로 된 사족의 절대다수가 한성부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한성부 사족의 수준이야말로 끝도 없이 펼쳐지는 유학의 숲에 빠져 있는 향촌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그러면 문과만 이렇고 끝인가.
그것이 아니다. 무과 급제자는 어떨까.
전체 무과급제자 약 30프로 정도가 서울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숫자는 조선후기 이른바 만과라 하여 한 번에 수천명씩 선발하는 무과 취재가 드물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당시 이 한성부 무과 급제자의 숫자가 얼마나 대단히 많았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시대 후기 오군영이라는 것을 우리는 범상히 듣는데,
반직업군처럼 되어 버린 오군영의 군관과 병사들이 어디 살았겠는가.
결국 한성부이고 이들 중 상당수는 무과급제를 통해 출신한 사람들이었다.
조선시대 후기의 무과 만과 급제자 방목을 보면 이들 중 상당수가 중인 내지는 서얼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들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무과 급제 후 군영에 소속되어 급료를 받으며 한성부에 살고 있었을 것이다.
거기다 한성부에는 이들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하는 시전 상인 등 평민이 있으며,
중인의 숫자도 다른 향촌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따라서 조선후기 한성부 인구 20만 (혹은 30만)이라고 하지만,
그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의 신분을 따져 보면 농민이 대다수를 점하는 향촌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격이 높았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마치 에도시대 쇼군이 사는 에도가 사무라이들이 몰려 사는 격이 높은 도시였듯이
한성부 역시 마찬가지로 여기 대대로 사는 경화사족뿐 아니라
오군영을 지지하는 무인들, 그리고 시장 상인들에 중인들까지 살고 있으니,
한성부의 인구 구성은 사실 도쿠가와 막부시절의 에도와 큰 차이가 없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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