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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적, 족보, 일기 이야기 (역사인구학)587

대동보가 등장하는 방식, 선세 계보의 합체 대개 체계화한 족보가 출현하기 이전에는아무리 잘난 집안도 자기 집안을 중심으로 직계를 그리고, 그 직계에서 가지를 친 모양의 소박한 계보만 소지하게 된다. 삼국사기 등에 초기 기록에서 왕실계보를 연상하면 된다.따라서 직계 계보도 간신히 그린 모양의 계보가 나오게 되는데예를 들어 태조의 선세 계보를 보면, 목조--익조--도조--환조의 직계계보 위주로 갖게 되니 이건 조선 태조 집안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 어떤 잘나가는 집안도 여말선초에 집안 족보를 그려 보라고 하면다들 대동소이했다. 그리고 이 직계 계보가 바로 후일의 대동보 원형이 된다. 이런 직계계보를 벗어나 파보가 만들어지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어느 집안 후손 중에 정말 잘 난 후손들이 자기 집을 중심으로 주변에 수단하여 자기.. 2025. 12. 23.
영남권이 현격히 낮은 전주이씨 분포 우리나라 본관별 분포가 국세조사 통계로 제공된다. 여기 보면 전주이씨 분포가 있는데 이 분포도를 보면 생각해야 할 부분이 매우 많다. 전주이씨 분포는 서울과 호서일대를 기반으로 전국적으로 분포하지만영남지역 분포가 확연히 주변보다 낮은 것을 볼 수 있다. 이 분포가 만들어진 이유가 무엇일까? 이렇게 분포가 만들어진 특별한 역사적 연유가 불확실하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분포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조선건국 이후 전주이씨의 확산이과전법 체제를 타고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한다. 과전법이라는 것이 조선 국가 전체를 대상으로 비교적 균일한 비율로 성립된 것이 아니라 과전이 집중적으로 형성된 지역이 있는 듯 한데, 이러한 흐름에서 영남이 어느 정도 예외적 상황이었던가 싶은 부분이 있다. 우리는 과전법 체.. 2025. 12. 23.
경화사족은 18세기 이후에 비로소 나타났는가 흔히 경화사족이라 하면 18세기 이후 서울을 중심으로 독점적 권력을 누린 사족들을 지칭하는 바 이를 대충 읽으면 경화사족 이전에는 향촌에 분포하는 사족 쪽에 권력이 있었다고 생각하게 되는데정말 그런가. 필자가 보기엔 우리나라 사족들권력과 재물을 독점한 사족들은 서울 경기 일원을 벗어나 존재해 본 적이 없다. 사림의 진출과 소위 산림이라는 이름으로 일이백년 향촌 사족들이 득세한 "일시적"상황이 있었을 뿐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래 도시의 사족을 향촌의 사족이 압도하거나 어깨를 나란히 한 적이 전혀 없다. 고려시대만 해도 권력을 누리던 사족들은 전부 개성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분포해 살았고, 조선이 건국하자 이번에는 한양을 중심으로 그 주변으로 옮겨와서울 안에 살면서 선산과 농지는 경기 일원에 가지고 있는 방식.. 2025. 12. 23.
사료로서의 족보 필자의 작업, 조선시대 19세기 말 검안 서류에는 단지 그 당시 검시 자료만 달랑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는 관련자들의 취조 증언이 들어 있어당시의 사회상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는 경우가 많다. 필자는 이 자료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검시자료였지만, 이 검시자료를 이해하려면 당시 정황을 알아야 하니 이것저것 공부하면서 여기에 이르렀다. 족보는 사실 필자는 보학자도 아니고, 보학 자체에는 별 관심 없다. 그리고 필자는 경험상 족보의 내용, 집안 전승의 내용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사람의 기억이란 묘하게 유리한 쪽으로 비트는 습성이 있어서 의도적이건 아니건 간에 족보는 그 족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희망을 반영한다. 단순히 우리 족보는 가짜가 아니다, 라는 것으로 이야기 할 만한 것이 아니다... 2025. 12. 22.
구한말, 조선인은 하나였을까 우리 역사를 보면, 구한말 외세 침략이 시작하면서 조선인은 하나로 그려진다. 일부 친일, 친러파 등을 제외하면 모두 외세에 저항하는 "민중"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이 "민중"은 일제시대까지도 그대로 "민중"이며해방이후에도 "민중"으로, 지금까지도 그대로 이어진다는 것이고, 이 "민중"에 들어오지 않는 극히 예외적 존재로 "친일파"를 설정해 두는 것이다. 그런데 구한말까지의 역사특히 19세기 우리나라 상황을 들여다 보면, 특히 조선시대 남아 있는 호적 200년치를 따라가며 보다 보면 구한말 조선인은 도저히 "민중"이라는 이름으로 묶을 수 있을 만큼 균일하지도 않고 단일한 집단도 아니며, 어떤 사건에 대해 일치단결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닌, 배경과 사정이 저마다 각각인 복잡 다단한 인구집단이.. 2025. 12. 21.
조선시대 호적의 노비: 왜 적어두었을까? 조선시대 호적을 보면, 양반 호의 경우 양반과 그 처가 주호와 주호의 처로 적히고 그 아래에는 자기 아들 딸 이름은 빼먹어도노비 이름은 노비라 표시하고 거의 반드시 아래에 적어둔 것을 본다. 이 호적 기록을 보면, 의문이 생긴다. 노비는 어차피 군역이든 뭐든 부과 대상이 되지 않으니 국가의 입장에서는 호적에 그 이름 적어둘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노비의 이름은 왜 적어두었을까? 바로 양반이 자신 소유의 노비를 추쇄하기 위해서였다고 본다. 노비는 호적에 적어두나 안적으나 마찬가지지만도망갔을 때를 대비해서 이름을 자기 밑에 적어두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도망노비가 발생했을 때 추쇄하여 소유권을 주장하기 쉬웠을 것이다. 관에서 만든 호적처럼 권위있는 자료란 조선시대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2025.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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