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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이 뽑아간 브란덴부르크 마차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Brandenburg Gate 콰드리가Quadriga 동상이다. 1788년과 1791년 사이에 지은 브란덴부르크 문은 베를린 최초의 그리스 부흥 건물이었다. 1793년, 이 문은 요한 고트프리트 샤도프 Johann Gottfried Schadow가 디자인한 콰드리가 동상을 장식함으로써 화룡점정했다. 하지만 이런 포지셔닝이 또 다른 분쟁을 불렀다. 1806년, 나폴레옹이 베를린을 점령했다. 이 야심만만한 프랑스 황제는 전쟁 전리품이자 승리의 징표로 콰드리가를 파리로 이송한다. 반달리즘 느낌도 살짝 나지만 그냥 약탈이고 쟁취다. 콰드리가Quadriga란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다. 2024. 7. 20.
이순신 수책거적도守柵拒敵圖를 다시 보며 일전에 소개한 적 있는 이순신의 북방 전투를 그린 수책거적도守柵拒敵圖다. 이 수책거적도를 다시 보면, 이 그림 주인공은 여진족도, 이를 방어하는 조선군도 아니고바로 뒤편에서 오돌오돌 떨고 있는 조선의 농부다. 성채 바깥에 펼쳐진 밭인지 논인지 이는 보는 시각에 따라 병사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둔전일 수도 있겠지만 병사가 이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구한말에는 심지어는 이런 군대의 보호없이도 농민들이 두만강을 넘어 청의 봉금封禁 지역으로 몰래 들어가 농사를 지었다. 농부는 땅을 갈아 먹고 살 수 있다면 어디든 간다. 고려시대 후기 오면서 이 땅에서 마침내 혼합농경이 안정적으로 경영되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그 결과가 북방 사민의 성공인데, 여기서 병사의 전투와 정치적 포석은사실 이 북.. 2024. 7. 19.
빚, 갚아야 하는 나와의 약속 이걸 꼭 계산적이라 할 수는 없으리라 본다. 사람이 살며 어찌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만 있으며, 그래서 필연으로 신세를 지게 되니, 이 신세에 말미암은 무형의 유산을 빚이라 한다. 내 아무리 내 잘난 맛에 산다한들 어찌 혼자서 예까지 왔겠으며, 무수한 관계로 특징짖는 네트워크에서 내가 때로 무엇을 해준 것이 있겠듯이 내가 신세 진 사람이 어찌 한둘이리오?그렇다 해서 내가 신세 진 그 무수한 사람을 어찌 다 기억하겠는가마는 그래도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만큼은 그에 대한 나름의 갚음은 있어야 한다는 의무는 언제나 안고 간다. 이걸 나는 나와의 약속이라 부른다. 그것이 꼭 유형일 수만은 없겠지만, 무형이라 하면 너무 막연해져서 주어진 자리에서 나한테 허여된 능력 안에서는 그런대로 내가 진 신세는 되도록 갚으려.. 2024. 7. 19.
저 무덤 이름은 경주찰보리총塚 메타세콰이어인지 뭔지 접때 듣기는 했지만 까먹은 저 나무가 어찌하여 저기 저런 양태로 자라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경주시에선 생뚱 맞다 해서 한 때는 제거해 버려야지 않는가 하는 논의가 없지는 않았다 기억하지만 그러게 간단히 내치기엔 이젠 놓쳐버리고 말았으니 시시각각 저 떼거리 나무가 뿜어내는 풍광이 만만치 아니해서 잎이 지금처럼 무성하면 무성한 대로 또 왁싱하면 왁싱 상태로 또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각양각색하는 풍광이 묘하기 짝이 없다. 오늘은 저 가랭이 사이로 기어들어가 봤다. 다섯그룬지 여섯그루가 옹기종기 올말졸망이라 저 나무가 묘한 것은 저 나무가 있음으로써 그렇지 아니했으면 그저그런 흔하디흔한 신라무덤에 지나지 않았을 저 씁쓸한 무덤들이 더욱 빛나게 하는 코러스가.. 2024. 7. 19.
잘만든 짜가가 초래하는 문제들 이 모습 보고선 예가 불국사로 알고 가시는 분이 의외로 많다. 진짜 불국사를 마주하고선 예도 똑같은 다보탑 석가탑 있네 하는 분도 있다면 믿기는가? 너무 그럴듯하게 만들어도 문제다. 저 모조품 역사도 제대로 정리해야 하는데 경주박물관에서 제대로 정리한 자료가 있는지 모르겠다. 저 분들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 직접 자손이다. 그 와중에 등장한 것이며 하도 잘만들어서 진짜가 없어지더라도 저 짜가만 살아남으면 진짜를 복원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2024. 7. 19.
신라통일 이후 북벌은 혼합농경 북상의 역사 앞에서 우리나라 잡곡과 도작은 기원을 달리하여 요서에서 남만주를 거쳐 들어온 잡곡과 산동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들어온 도작이 만나서 도작과 잡곡이 어우러진 혼합농경이 성립된 곳은 아마도 평양과 황해도 일대 서북지역일 것이라 하였다. 이 혼합농경이 더욱 남하하여 이루어진 판도가 세형동검문화와 얼추 맞아 떨어지지 않을까 한다. 따지고 보면 대략 고려의 천리장성 정도가 바로 혼합농경의 북방경계였을 것이라 보는데, 윤관정벌과 공민왕의 북벌, 세종대의 북벌 등은 모두 바로 이러한 혼합농경의 북벌과 궤를 같이 하지 않을까. 따지고 보면 윤관북벌 이후 우리나라 함경도 지역의 식민은 농업 기술 혁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 아래 지도를 보면 알수 있다. 삼국시대-고분시대 도작이 도달할 수 있는 위도는 북위 40도.. 2024.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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