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New Reading of History and Histories63 삼국사기 지리지는 고려와 고구려를 혼동했다 고려 태조 13년(930), 왕건은 고창(안동) 전투에서 견훤에 대승하면서 승기를 완전히 잡는다. 한데 이 사정을 전하는 기록이 심상치 않다. 이때 왕건은 지금의 경상도 중북부와 영동을 다 손아귀에 넣고 지금의 포항에까지 진출했다. 《삼국사기》 지리지가 정리한 고구려 영토는 얼토당토않다. 영일현, 그러니깐 지금의 경북 포항까지, 어느 때인지는 모르나 고구려 수중에 있었다고 한다. 이는 택도 없는 소리다. 함에도 이런 택도 없는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무모한 시도도 없지는 않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인가? 나는 《삼국사기》가 고려와 고구려를 헷갈리는 바람에 저리 잘못 정리했다고 본다. 아래는 《고려사절요》 해당년 기록이다. 봄 정월에 재암성(載巖城․경북 청송 진보) 장군 선필(善弼)이 와서 .. 2018. 2. 11. 이성계의 장송의례와 수릉壽陵 태조실록 권제7, 태조 4년(1395) 3월 4일 정유 첫 번째 기사로 이성계가 자기가 묻힐 묏자리를 둘러본 일이 다음과 같이 실렸다. 상께서 과주(果州)로 거둥하여 수릉(壽陵) 자리를 살폈다. 돌아올 때 도평의사사 주최로 두모포(豆毛浦) 선상(船上)에서 술상을 차리고 여러 신하가 차례로 술잔을 올렸다. 정도전이 나와서 말하기를 “하늘이 성덕(聖德)을 도와 나라를 세웠으매, 신들이 후한 은총을 입고 항상 천만세 향수(享壽)하시기를 바라고 있사온데, 오늘날 능 자리를 물색하오니, 신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하고 흐느껴 눈물 흘리니, 임금이 말했다. “편안한 날에 미리 정하려고 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우는가?” 왕심촌(往尋村) 노상(路上)에 이르러 임금이 말을 달려 노루를 쏘려 했지만, 마부 박부금(朴夫.. 2018. 2. 11. 정다산의 중국환상 "중국은 문명이 발달해 아무리 외진 시골이나 먼 변두리 마을에 살더라도 성인이나 현인이 되기에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서울 사대문에서 몇 리만 떨어져도 아득한 태고적처럼 원시사회다. 하물며 멀고먼 시골은 어떠하랴? 무릇 사대부 집안은 벼슬길에 오르면 서둘러 산기슭에 셋집을 얻어살면서 선비로서의 마음가짐을 잃지 않아야 한다. 혹시 벼슬에서 물러나더라도 재빨리 서울 근처에 살며 문화의 안목을 떨어뜨리지 말아야 하니 이것이 사대부 집안의 법도다." 유배지에서 다산 정약용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 한 구절이다. 원문을 대조하지 않고 누군가의 번역을 옮긴다. 원문이 없으니 대조가 불가능하다. 다산...요즘 태어났으면 재빨리 미국으로 날랐을듯.. 거기서 원정출산도 했을 듯 왜 중국이었을까? 그것이 단순한 환.. 2018. 2. 3. 왕건의 죽음과 이일역월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의하건대, 고려 건국시조 태조 왕건은 서기 943년 음력 5월 29일, 양력 7월 4일에 사망한다. 이틀 뒤에 발상發喪하고, 그 다음날 그의 시신은 빈전殯殿에 간다. 빈전은 궁궐 정전 혹은 편전이었을 상정전詳政殿 서쪽 뜰에다가 마련했다. 빈殯을 마치고 그를 장사한 때가 같은 해 음력 6월 26일, 양력 7월 30일이다. 그의 무덤은 현릉顯陵이라 했다. 이로써 본다면 왕건은 죽은 시점을 기준으로 정확히 27일 만에 묻혔다. 나아가 왕건 기제忌祭는 매년 6월 1일이다. 이런 상장喪葬제도를 보건대, 고려는 이미 건국과 더불어 왕에 대해서는 한 달을 하루로 쳐서 27일간 상장 의례를 치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상장제를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라 한다. 말 그대로 하루를 한 달로 친다는 .. 2018. 1. 31. 인덱스index vs 색인索引 vs 인득引得 인덱스index에 해당하는 말이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에는 원래 없었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색인(索引)’이라는 말이 그 번역어로 절대 강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 말은 애초에 일본에서 인덱스에 대한 번역어로 만들어낸 말로써, 그것이 다시 한국과 중국으로도 침투해 광범위하게 사용한다. 한데 중국에서는 색인이라는 말 대신에 ‘인득(引得)’이라는 말도 더러 사용한다. 요새 학술계에서는 이 말이 서서히 대세를 장악해 가는 느낌을 받는다. 한데 인덱스에 해당하는 일본식 한자어 색인을 버리고 인득이라는 말을 쓰게 된 사유가 무척이나 재밌다. 引得이라는 말 역시 근대의 발명품인데, 이 말을 제안한 이는 안식년을 맞은 국내 교수들이 툭 하면 똥 폼 낸다고 싸질러 가는 미국 하버드 옌칭연구소의 발명품이다. 이 연구소에.. 2018. 1. 30. <한문 강좌> 使, 令으로서의 以 얼마 전에 나는 를 읽다가 그에서 나오는 다음 구절.... 唐明皇以諸王從學,命集賢院學士徐堅等討集故事,兼前世文詞,撰《初學記》。 을 예로 들면서 이 구절은 "당 명황(현종)이 제왕인 아들들에게 공부를 시키고자 할 요량으로 집현원학사인 서견 등에게 명하여 고사 모아서....초학기라는 책을 편찬케 했다"고 옮기면서 이 경우 以는 使나 令에 해당하는 사역 동사라고 말한 바 있다. 한데 각중에 과연 以가 이런 뜻으로 쓰인 경우가 있는지 추가로 조사해 보고픈 욕망이 있어 강희자전 등을 뒤졌더니 전한 말기에 유향이 편집한 《전국책战国策》卷三 진책秦策 一에서 이와 같은 맥락으로 사용한 다른 용례를 검출했다. 泠向謂秦王曰: 向欲以齊事王, 使攻宋也. 영향(泠向)이 진왕(秦王)한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제나라가 왕을 섬기게.. 2018. 1. 30. 이전 1 ··· 6 7 8 9 10 11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