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분류 전체보기21922 보존처리 중이던 백제 나무삽 궁남지 인근 부여 화지산 유적 백제시대 건물터 인근에서 발굴한 나무삽 열한자루가 보존처리를 위해 식염수에 잠수 중이다. (2016. 8. 11) *** 보존처리가 끝났는지 모르겠다. 7년이나 지났으니 말이다. 백제는 삽질 왕국이었나? 2023. 8. 11. 부여나성 발굴현장 back to 2016 부여나성 발굴현장. 예상대로 구간을 나눈 흔적이 완연하고 후대보축 성벽도 드러난다. 바깥 성벽 기저부 처리기법도 엿보인다. 알아서 판단해라. (2016. 8. 11) *** 사진 속 주인공은 심상육 선생이다. 저때 나는 해직 중이었다. 2023. 8. 11. 동서양 광자狂者의 만남 동서양 광자狂者의 만남 오르세미술관에서 괜히 한번 가주야대는 곳인 듯 해서 가줬다. 미술관은 입장객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로 유명하나 순전히 이는 노이즈 마케팅 덕분이다. 콜렉션 수준은 꽝이라, 습작 수준이며 어디서 긁어다 모은 짜투리들만 잔뜩 갖다놓았다. 인상파 대작도 단 한 점이 없다. 역사驛舍를 재활용한 미술관이라는 점 딱 하나다. 이 전략이 대성공을 거두었다. 왜 미술관을 가는가? Vanity다. 첫째도 둘째도 배너티다. (2017. 8. 11) *** 저 미술관에서 귀짜름 고흐를 조우한다. 2023. 8. 11. 막부 학문소와 동경대학 이제 동경대 이야기를 해 보자. 일본 근대교육제도에서 메이지 초년에 원래 일본 전체에서 대학은 동경제국대학 단 한 개였다. 이러한 상황은 제국대학령에 의해 동경대 외에 쿄토대 등 다른 제국대학이 추가로 설치되면서 달라지게 되었지만, 아무튼 메이지시대의 교육제도 초반은 상당기간은 일본에 대학이 단 한 개만 있는 상황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원래 메이지 정부의 방침은 동경대를 막부의 공식적인 최고학부인 昌平坂学問所를 중심으로 만들려고 했었다. 昌平坂学問所는 강항으로 부터 감화받아 일본최초의 본격적인 성리학자가 된 후지와라 세이카의 제자, 하야시 라잔이 막부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것으로 에도 막부의 명실상부한 최고학부가 되었다. 이 학문소의 유지가 일본 동경 간다역 근처에 가면 아직 남아 있는데 지금은 "유지마.. 2023. 8. 11. 허망한 이인로의 대답, "이거 제 글씹니다" 이인로(李仁老, 1152~1220)의 을 보면 고려 중기에 있었던 어떤 흥미로운 사건을 하나 기록하고 있다. 옛 어른들의 감정 - 흔히 배관拜觀이라고 하는 - 실력이 어떠했는지 미루어 짐작해보도록 하자. 내가 일찍이 높으신 분의 댁[貴家]의 벽에서 초서(草書)가 적힌 족자 두 점을 보았는데, 연기에 그을리고 집안으로 샌 빗물에 젖어 형색이 자못 기이하고 예스러웠다. 그 시에 이르기를, 시가 적힌 단풍잎이 궁궐[鳳城]에서 나오니 紅葉題詩出鳳城 눈물 자국은 먹과 섞이며 오히려 분명하네 淚痕和墨尙分明 궁궐 도랑에 흐르는 물 흐려서 믿을 수 없네 御溝流水渾無賴 궁녀의 한 조각 마음을 흘려보냈다기에 漏洩宮娥一片情 이라고 하였다. 좌중 손님들이 모두 머리를 모아 보면서 당唐 · 송宋 시절 사람의 필체라 여겼다. 분.. 2023. 8. 11. 아이지현愛知県 제4중학이 된 번교藩校 시습관時習館 1752年(宝暦2年) - 藩校時習館、藩主松平信復により、城内の八丁小路(現在の豊橋市八町通)に設立。 1806年(文化3年) - 「時習館規条」制定。 1872年(明治5年) - 藩校時習館廃止。 1893年(明治26年) - 私立補習学校時習館(愛知県立時習館高等学校の前身)設立。藩校時習館の名を借りて称した。 1900年(明治33年) - 愛知第四中学校(ナンバースクール)へ改名。 1948年(昭和23年)10月 - 豊橋時習館高等学校の校名に改称し、「時習館」の名称が復活する。 1956年(昭和31年) - 愛知県立時習館高等学校に改称。 아이치현에는 미카와요시다 번이 있었는데 이 번의 번교藩校를 논어의 글귀를 따 시습관時習館이라 불렀다. 번교가 설립된 시기는 1752년. 메이지유신후 폐지되었다가 사립학교로 전환되었고, 1900년에 아이치현의 제4중학.. 2023. 8. 11. 이전 1 ··· 1657 1658 1659 1660 1661 1662 1663 ··· 3654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