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내 글씬데>
이인로(李仁老, 1152~1220)의 <파한집>을 보면 고려 중기에 있었던 어떤 흥미로운 사건을 하나 기록하고 있다.
옛 어른들의 감정 - 흔히 배관拜觀이라고 하는 - 실력이 어떠했는지 미루어 짐작해보도록 하자.
내가 일찍이 높으신 분의 댁[貴家]의 벽에서 초서(草書)가 적힌 족자 두 점을 보았는데, 연기에 그을리고 집안으로 샌 빗물에 젖어 형색이 자못 기이하고 예스러웠다. 그 시에 이르기를,
시가 적힌 단풍잎이 궁궐[鳳城]에서 나오니 紅葉題詩出鳳城
눈물 자국은 먹과 섞이며 오히려 분명하네 淚痕和墨尙分明
궁궐 도랑에 흐르는 물 흐려서 믿을 수 없네 御溝流水渾無賴
궁녀의 한 조각 마음을 흘려보냈다기에 漏洩宮娥一片情
이라고 하였다.
좌중 손님들이 모두 머리를 모아 보면서 당唐 · 송宋 시절 사람의 필체라 여겼다. 분분하게 〈논의해도〉 그 실상을 얻지 못하고 나에게 와 답해 달라 물으니, 내가 천천히 답하여 말하기를, “이건 제가 직접 쓴 글씨입니다.”라고 하였다.
손님들이 경악하여 말하기를, “비단이 상하고 얼룩이 진 걸 보면, 요즘의 물건이 아닌 것 같소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는 제가 역사를 읊은 시[詠史詩] 중 한 편인데, 저는 제가 지은 것이 아니면 일찍이 붓을 놀려 초서를 쓴 적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단풍잎에 시를 적어 궁 밖으로 흘려보낸 궁녀 이야기는 당나라 말에 있었던 일이라는데, 워낙 낭만적이라 그런지 그야말로 '인구人口에 회자會炙'된 모양이라, 원나라 때 도자기에도 그 고사를 재현해놓은 것이 있을 정도이다(사진: 신안해저유물 중 <백자진사시명접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리고 의외로 족자는 걸어놓고 햇빛과 연기 좀 받고 습기 먹고 하면 금방 누래지고 쭈글쭈글해진다.
다시 말해 '옛 맛', 일본어로 '지다이' 느낌이 나게 된다.
*** Editor's Note ***
이 일화는 제법 잘 알려진 것이라
이 일을 왜 굳이 이인로는 문자화해서 남겼을까?
자기 자랑이다.
난 이미 수준이 당송 대가들과 나란히 한다. 딱 그 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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