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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행민李行敏 <경운도를 보고[觀慶雲圖]> 이 역시 서성 선생 글이다. 觀慶雲圖 ‘경운도’를 보고 이행민李行敏 縑素傳休祉, 하얀 명주가 아름다운 길상을 전하여 丹靑狀慶雲. 단청으로 상서로운 구름을 그렸어라 非煙凝漠漠, 안개가 아니면서 막막히 엉겨있고 似蓋乍紛紛. 산개(傘蓋) 같으면서 갑자기 분분히 흩어지네 尙駐從龍意, 구름은 용을 따른다는 뜻을 넣었고 全舒捧日文. 해를 받드는 형상을 펼쳤구나 光從五色起, 빛은 오색 구름에서 일어나고 影向九霄分. 그림자는 구천을 향해 흩어지네 裂素留嘉瑞, 비단을 자른 화폭에 상서로움을 남겼으니 披圖賀聖君. 그림을 열어보고 성군을 축하하네 寧同窺汗漫, 광대한 하늘을 바라본 것과 같으니 方此睹氛氳. 여기에서 무성한 기운을 목도하노라 〔해설〕 ‘경운도’를 보고 지은 제화시(題畵詩)이다. 그림을 사실과 같이 여기는 고대 .. 2018. 9. 22.
나양羅讓 <윤달로 정한 사시(閏月定四時)> 이 역시 서성 선생 글이다. 나양(羅讓·767~837)은 자가 경선(景宣)이며, 월주 회계(會稽·절강 소흥시) 사람이다. 경조윤을 지낸 나향(羅珦)의 아들. 801년 진사과에 급제하고, 806년 재식겸무명어체용과(才識兼茂明於體用科)에 급제하여 함양위(咸陽尉)에 제수됐다. 809년 부친이 사망하자 여러 해 동안 상을 지키며 징초에 응하지 않았다. 나중에 회남절도사 이부(李鄜)의 종사(從事)가 되었다. 나중에 감찰어사, 전중시어사, 이부원외랑, 사봉랑중 등을 역임했다. 831년 급사중에서 복건관찰사로 출임하고, 다시 들어와 좌산기상시가 되다. 836년 강서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죽었다. 《신당서》에 저작 30권이 있다 했지만 나중에 망일되었다. 현존하는 작품은 시 2편, 부 3편, 대책(對策) 1편 뿐이다.. 2018. 9. 22.
독고수獨孤綬 <연못에 감춘 옥 [藏珠於淵]> 이 역시 서성 선생 글이다. 독고수獨孤綬는 779년 진사과에 급제하였고, 이후 박학굉사과에도 급제하였다. 그밖의 사항은 미상. 독고수는 부賦와 송頌에 뛰어났는데, 「방순상부」放馴象賦는 덕종德宗이 격찬했다. 그의 작품은 『전당시』에 시 2수가 실려 있고, 『전당문』에 문장 24편이 전한다. 藏珠於淵 옥을 연못에 감추다 至道歸淳朴 최고의 도는 순박으로 돌아가는 것 明珠被棄捐 보옥 주웠다 해도 버려야 하리 失眞來照乘 진솔함 잃으면 수레 비추는 보옥에 불과하나 成性却沈泉 천성 이루면 오히려 샘물에 잠긴다네 不是靈蛇吐 뱀이 수후隋侯한테 물어준 게 아니라 猶疑合浦旋 합포合浦로 진주 돌아온 일 같으니 岸傍隨月落 강가 언덕에 달과 함께 떨어지고 波底共星懸 파도 아래 별과 함께 걸렸네 致遠終無脛 발 없어도 결국은 멀리 .. 2018. 9. 22.
우윤궁于尹躬 <동짓날 태사국 관리가...(南至日太史登臺書雲物) 이 역시 서성 선생 페이스북 포스팅에서 가져왔다. 우윤궁(于尹躬)은 于允躬이라고도 쓴다. 경조 만년(萬年·서안시) 사람으로 부친 우소于邵도 문명이 있었다. 대력 연간(766~779)에 진사과에 급제한 후, 807년 중서사인에 올랐고, 811년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811년 5월 동생 죄에 연좌되어 양주자사洋州刺史로 폄적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현재 시 1수가 전한다. 南至日太史登臺書雲物 동짓날 태사국 관리가 대에 올라 경물을 기록하다 至日行時令, 동지에 월령을 시행하니 登臺約禮文. 대에 올라 예식을 거행하여라 官稱伯趙氏, 관직은 백조씨伯趙氏라 칭하고 色辨五方雲. 색으로 오방의 구름을 분별하네 晝漏聽初發, 낮 물시계가 막 시작하는 걸 듣고 陽光望漸分. 태양 빛이 점점 옮겨가는 걸 보네 司天爲歲備.. 2018. 9. 22.
[唐] 두원영杜元穎 <옥수기방류 玉水記方流> 서성 선생님 글이다. 원의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내가 약간 손을 대고, 명백한 오타는 바로잡았다. 나아가 간혹 내가 새로 보강한 대목도 있다. *** 두원영杜元穎(769-833)은 경조京兆 두릉杜陵(서안시) 사람이다. 800년 진사과에 급제하고, 806년에는 박학굉사과에 급제했으며, 816년 무재이등과茂才異等科에 급제했다. 젊어서부터 절도부에서 두 번 징초徵招받았다. 817년 좌습유에서 시작해 태상박사, 우보궐을 거쳐 820년 중서사인에 올랐다. 821년 마침내 재상이 되었다가 823년 검남서천절도사로 출임出任했다. 당시 황제 경종敬宗이 사치하자 두원영은 적극적으로 진기한 물건을 색출하고, 심지어 군량까지 헐어 상납했기에 백성과 병사들 원망을 샀다. 829년 성도成都가 남조南詔한테 침략당해 크게 피폐.. 2018. 9. 22.
자기PR은 이렇게...강세황과 원매의 경우 ** 2013년 9월 22일 내 페이스북 포스팅을 글을 약간 손질한다.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이 양반 올해(2013년을 말함-저자이자 인용자 추기) 탄신 300주년이라 해서 여기저기서 관련 기념행사를 했거나 하거니와, 시·서·화 삼절(三絶)이라 일컬었다는 이 양반, 자기 자랑 증세가 심했으니, 그의 글을 엮은 《표암유고(豹菴遺稿)》를 보건대, 석가재(夕可齋) 이태길(李泰吉)이라는 친구가 금강산으로 유람하러 떠날 적에 그에게 써 준 글이 있으니, 이 글 첫 대목은 이렇다. 내 친구인 석가옹이 중랑(中郞) 원굉도의 유람기를 읽고는 그의 아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의 글이 표암의 단편들에 미치지 못하니 볼 만한 게 무에 있겠는가?"라고 했다. 뒤에 이어지는 문장은 안봐도 비디오다... 2018.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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