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평왕 시대 신라인으로 사량궁 사인으로 있으면, 다른 사인들이 관청 곡식을 몰래 빼돌리는 일에 가담하지 않아 그들에게 독살됐다. 근랑(近郞)이라는 풍월주를 따라 수양하면서 의로운 것이 아니면 사사롭게 취할 수 없다는 신념을 익혀 이를 실천에 옮겼다.
삼국사기 권 제48(열전 제8) 검군 열전 : 검군(劍君)은 대사(大舍) 구문(仇文)의 아들로 사량궁(沙梁宮)의 사인(舍人)이 되었다. 건복(建福) 44년 정해(진평왕 49: 627) 가을 8월에 서리가 내려 여러 농작물을 말려 죽였으므로 다음 해의 봄으로부터 여름까지 큰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자식을 팔아 끼니를 메웠다. 이때 궁중의 여러 사인(舍人)들이 함께 모의하여 창예창(唱倉) 곡식을 훔쳐 나누었는데 검군만이 홀로 받지 않았다. 여러 사인이 말하기를 “뭇 사람이 모두 받았는데 그대만이 홀로 물리치니 어떤 이유에서인가? 만약 양이 적다고 여긴다면 청컨대 더 주겠다!” 하였다. 검군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근랑(近郞)의 문도(門徒)에 이름을 붙여 두고 화랑의 뜰[風月之庭]에서 수행하였다. 진실로 의로운 것이 아니면 비록 천금의 이익이라도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하였다. 당시 이찬(伊飡) 대일(大日)의 아들이 화랑이 되어 근랑이라고 불렸으므로 그렇게 말했다. 검군이 나와 근랑의 문 앞에 이르렀다. 사인들이 몰래 의논하기를 “이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말이 새어 나갈 것이다.” 하여 드디어 불렀다. 검군이 자기를 모살할 계획을 알았으므로 근랑과 작별하며 말하기를 “오늘 이후에는 서로 다시 만날 수 없습니다”고 했다. 근랑이 그 이유를 물었으나 검군은 말하지 않았다. 두세 번 거듭 물으니 이에 그 이유를 대략 말하였다. 근랑이 “어찌 담당 관청에 알리지 않는가?”라고 말하니 검군이 말하기를 “내 죽음을 두려워하여 뭇 사람으로 하여금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은 인정상 차마 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찌 도망가지 않는가?” 하니 “저들이 굽고 나는 곧은데 도리어 스스로 도망가는 것은 대장부가 할 일이 아닙니다.” 하고, 드디어 모임 장소에 갔다. 여러 사인이 술을 차려 놓고 사죄하였다. 몰래 약을 음식에 섞었는데 검군이 이를 알고도 꿋꿋하게 먹고 죽었다. 군자가 말하기를 “검군은 죽어야 할 바가 아닌데 죽었으니 태산(泰山)을 기러기털[鴻毛]보다 가벼이 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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