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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자대사(廣慈大師)

by taeshik.kim 2018.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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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사(大安寺) 광자대사비(廣慈大師碑․950․광종 1년) : 유당(有唐) 고려국(高麗國) 무주(武州) 동리산(桐裏山) 대안사(大安寺) 광자대사비문(廣慈大師碑文)과 아울러 서문. 태상(太相) 전수예빈령(前守禮賓令) 원봉령(元鳳令) 겸지제고(兼知制誥) 상주국(上柱國)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 신(臣) 손소(孫紹)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사찬(沙粲) (결락) 監 (결락) 賜緋魚 (결락) 는 비문을 쓰다. 대저 허공을 쳐서 메아리를 나타나게 하는 것은 진실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능력에 응하는 진실만은 취하고 소리를 감추려 한 것이니, 어찌 이것이 미혹에 처하는 술문(術門)이 아니겠는가. 비록 넓으나 피안(彼岸)으로 나아갈 수 없고, 비록 밝으나 그 경지를 넘기는 어려운 것이다. 지극한 이치가 그 가운데 있으니 그루터기만 지키게 하는 자는 견성(見性)할 수 없으며, 진종(眞宗)은 마음 밖에 있어서 규관(窺管)하는 사람은 심인(心印)을 전해 받을 수 없다. 여러 생(生) 동안 도아(道芽)를 심었으므로 비로소 다생(多生)의 법기(法器)를 주조하였다. 그리하여 불교가 발상한지 약 1천년 후에 비로소 중국으로 전래되었고, 그로부터 약 5백 성상을 지난 뒤에 우리나라 스님들이 중국으로 유학하러 가서 현철(賢哲)을 만나고 법을 전해 받아 귀국하였다. 그 중에는 칠정(七淨)을 이어 받아 걸출하였으며, 혹은 십지(十智)를 쌓아서 높이 빼어났으니, 옛부터 희유할 뿐 아니라 지금도 존귀한데, 선과 교를 양전(兩全)하여 쌍미(雙美)한 분이 계시니 곧 우리 스님이시다. 대사의 법휘는 윤다(允多)요, 자는 법신(法信)으로 경사(京師) 출신이다. 그의 조부모는 귀족으로서 고관(高官)을 역임하였으며, 효도와 의리를 소중히 여겨 충효의 본이 되었다. 이렇게 가문을 지켰지만, 난리가 나서 몰락하였다. 그러나 명성과 칭송은 많은 사람들의 귀와 귀로 들렸고, 입과 입으로 옮겨 자자하였다. 어머니는 박씨(朴氏)로 성품이 온화하여 사람됨이 정결하였다. 어릴 때부터 속되지 않았으며 未長 (결락) 經. 성심성의로 불사(佛事)를 닦아 산악(山岳)과 같은 정기를 받아 잉태하고 또 어려움 없이 분만하였으니, 효감(孝感)을 말미암아 순산함이 마치 가을에 서리를 맞은 씀바귀가 쉽게 뽑히듯 산고 없이 함통(咸通) 5년 4월 5일에 탄생하였다. 대사가 처음 봉시(蓬矢)를 쏘는 날에 쌍주(雙柱)가 절륜(絶倫)하였다. 장차 강보(襁褓)의 나이를 지나 삼정(三亭)이 전려(轉麗)하여 (결락) 멀리 집 밖에 나가서 놀되, 항상 장소를 일정하게 하였고, 예의와 법도는 아무리 위급한 조차전패(造次顚沛)의 경우라도 예를 그르치지 아니하였다. 지극히 효도를 다하여 선침(扇枕)의 칭송은 어려서부터 고향 주변에 널리 알려졌으며, 추회(搥灰)와 같이 민첩한 변재는 바람을 타고 멀리까지 퍼져 갔다. 나이 겨우 7~8세에 이미 불교에 몸을 던져 수도할 뜻을 품었으니, 부모에게 와문(蝸門)을 이별하고 선교(禪敎)에 입문하기를 청하였다. 이 때 부모는 더욱 애절하여 倍 (결락) 前. 더욱 애정에 얽혀 허락하지 못하였다. 허락을 받지 못한 대사(大師)는 잠연(潛然)히 실망하였고, 이를 본 어버이는 설득하되 “출가 수도하는 것도 이익이 없지 않으나 옹자(翁子)인 주매신(朱買臣)의 금의출세(錦衣出世)하는 것이 어찌 산승(山僧)의 취납(毳衲)인 누더기로 고행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하면서, 슬피 울며 거듭 거듭 만류하여 뜻을 바꾸도록 하였으나, 어버이는 마침내 아들의 뜻이 굳고 굳어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허락하였다. 대사는 다음날 부모의 슬하를 떠나 (결락) 걷고 걸어서 구름처럼 사해(四海)로 행각하였다. 다니거나 머무름에 오직 외로운 자신의 그림자와 벗할 뿐이었다. 이와 같이 어느덧 염량(炎涼)이 바뀌어 수년이 지났다. 이로부터 다시 발걸음을 돌려 요동(遼東)을 거쳐 길을 재촉하여 전라남도 곡성군 태안사가 있는 동리산(桐裏山)으로 가서 상방화상(上方和尙)을 친견하였다. 서로 면목(面目)을 대하고 형용(形容)을 돌아보았으니 며칠 후 상방화상(上方和尙)을 시봉하게 되었다. 화상이 말하기를 “(결락) 옛 사람이 말하되 마음이 오롯하면 돌도 가히 뚫을 수 있고, 뜻이 간절하면 땅에서 갑자기 샘물이 솟아오르게 된다. 도(道)는 몸 밖에 있지 않으며 부처님은 마음에 있는 것이다. 숙세(宿世)로부터 익힌 자는 순간인 찰나(刹那)에 깨닫게 되고 몽매한 자는 만겁에도 생사에 윤회하여 벗어나지 못하니, 부처님께서 일러 주시되 ‘정신이 어두운 자는 재삼 여러 번 일러주어야 하지만 근기(根機)가 수승한 사람은 말을 생략한다’ 하였으므로, 너는 스스로를 잘 살펴보고, 나의 말에 걸려 있지 말라”고 하였다. 스스로 (결락) 가야갑신수(伽耶岬新藪)에서 구족계를 받은 후로는 다만 원숭이 같이 단단히 얽어 매였고, 말 같은 의식 또한 놓아두지 아니하였다. 계(戒)를 받은 후로부터 유발(油)을 기울어지지 않게 하였다. 계를 지키려는 굳은 마음은 주야로 한결같고, 수도하려는 강철 같은 마음은 순간에도 쉬지 아니하였다. 대문과 창문을 열고 들어가지 아니하여도 대도(大道)를 보았으며, 곤륜산에 오르거나 여해(驪海)에 들어가지 않고도 쉽게 신주(神珠)를 얻었다. 도덕 또한 고매하여 아름다운 명성은 사방에 떨쳤고, 법을 배우고자 하는 법려(法侶)들이 8표(八表)로부터 모여 들었다. (결락) 법조(法祖). 서당지장(西堂智藏)은 혜철(慧徹)에게 전하였고, 혜철은 여(如)인 도선(道詵)에게 전하였으며, 여(如)인 도선(道詵)은 우리 광자(廣慈)스님에게 전하였으니, 즉 서당의 증손(曾孫)인 셈이다. 대사는 서당(西堂)의 법통을 전해 받았으니, 수고롭게 서학(西學)을 하지 않고도 세상의 인연을 동성(東城)에 베풀었다. 참으로 실제(實際)가 본공(本空)한 줄 깨달았으며 (결락) 동인(東人)을 바른 길로 인도하였다. 무학(無學)의 종지인 선(禪)을 배우되 마침내 지야(祇夜)를 의지하고, 무사(無師)의 취지(趣旨)를 스승으로 하되 반드시 수다라(修多羅)를 가자(假藉)하였다. 드디어 일심(一心)을 닦는 자로 하여금 일음(一音)의 교리를 믿게 하며, 구결(九結)에 얽힌 사람으로 하여금 점차로 구업(九業)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여러 가지 방편으로 인도하였으니, 위력으로 사견(邪見)을 꺾고 교화한 인연이 제잠(鯷岑)에 두루하였으며, (결락) 심사구도(尋師求道)한 자취가 도야(桃野)에 두루 닿지 아니한 곳이 없었다. 행각 중에 있으면서도 항상 본사(本寺)를 잊지 아니하다가 고산(故山)으로 돌아왔다. 이틀째 되던 날 밤에 갑자기 산적이 절에 침입하여 의물(衣物)을 빼앗고자 상방화상(上方和尙)의 방으로 들어왔다. 대사는 우연히 뜻밖의 일을 당하였으나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좌(禪座)에서 움직이지 아니하였고, 위봉(威鋒)을 당하여서는 오히려 그들의 악한 마음을 버리게 하여 지혜의 칼로써 마구니들을 항복시켰다. 적도(賊徒)들이 (결락) 충돌함이 없었다. 대사는 도적들에게 죄란 본래 없는 것이라 하여 허물을 탓하지 아니하니 스님의 말이 끝나자 도적들은 공손히 예배하고 물러갔다. 이 광경을 지켜본 대중들은 감탄하였다. 그날 밤 꿈에 한 전장(戰將)이 법당에 들어가 칠구(七軀)의 물타나(勿陀那)를 보았는데, 맨 끝에 있는 물타나(勿陀那)가 대사를 향하여 (결락) 중인(重忍)이란 두 글자를 적었다. 꿈을 깨고 놀라 일어나 세수한 다음 단정히 앉아 생각하되 “이상하고 이상하다. 백일천하(白日天下)에 의심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고, 밤중에 나비의 꿈을 꾼 것은 고인(古人)이 겪은 사실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되, ‘한번 참는 것은 영원한 기꺼움을 얻게 되고, 또 한번 참는 것은 세상을 살아감에 편안함을 얻게 된다’고 하였으니, 중인(重忍)이란 두 글자가 어찌 비범한 일이겠는가!” (결락) 대사는 이로 인하여 길이 참선하며 오래도록 이 절에 있게 되었다. (결락) 黃波 (결락) 선의 근본을 통달하였고 성인의 말씀을 초연히 여겼으며, 성색(聲色)의 소굴을 떠나 시비(是非)의 관문을 벗어나게 되었다. 납자(衲子)들은 (결락) 스님의 문 앞에 가득하고 의리를 사모하며 인(仁)을 따르는 이들이 구름과 안개처럼 모여들었다. 참선학도하는 자들은 빈손으로 와서는 마음 가득 채워 돌아갔다. 효종대왕(孝宗大王)은 대사가 산곡(山谷)에서 드날리는 도풍(道風)을 흠모하여 윤한(綸翰)을 보내어 지혜의 눈을 뜨게 해 주시고 나라 또한 복되게 해주기를 발원하였다. 이미 이때에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져 자주 병화(兵火)가 일어났고, 궁예(弓裔)는 어지럽게 난동하고 견훤(甄萱)은 자칭 왕이라 하여 이름을 도용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천명이 왕건에게로 돌아가 고려라는 새 나라를 건립하게 되었다. (결락) 한 때 낭연(狼煙)이 높이 올라 왕래하기가 고통스러웠으므로 스님들은 따로 왕을 도울 길을 찾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신성대왕(神聖大王)이 때를 타고 성주(聖主)가 되어 한대(閒代)의 명군(明君)으로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세속을 편하게 하는 굉기(宏機)를 풍부하게 가졌으며, 불법을 보호하고 진리에 계합(契合)하는 신술(神術) 또한 능통하였다. 나라 일을 보는 여가에는 마음을 항상 현문(玄門)에 두었다.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대사의 명성을 널리 들었기에 낭관(郞官)으로 하여금 어찰(御札)을 가지고 스님이 계시는 동리산으로 보내어 청하되 “도덕을 앙모한 지 이미 오래되오니 스님의 거룩한 모습 뵙기를 원합니다”라 하면서 “스님께서는 이미 연로하셔서 보행하시기 힘들 터이오니, 말을 타고 구중(九重)으로 오신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대사가 말씀하시되 “노승(老僧)이 출가한 이래로 이제 80세에 이르기까지 아직 말을 탄 적이 없습니다. 산승(山僧)도 역시 왕의 국민이니 어찌 감히 왕명을 거역하겠습니까”하고 석장망혜(錫杖芒鞋)한 보행으로 연하(輦下)에 도착하니 임금이 크게 기꺼워하여 의빈시(儀賓寺)에 모시고 며칠 동안 편안히 쉬시게 한 다음, 상전(上殿)으로 영입하였고 임금 스스로 상(床)에서 내려와 공손히 영접하여 빈객(賓客)의 예로써 대우하였다. 군신들이 이를 보고 그윽이 놀랐다. 임금이 묻되 “옛 스님이 말하길 마음이 곧 부처라 하니 이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대사가 대답하되 “만약 열반의 경지에 도달한 이는 불(佛)과 마음에도 머물지 아니합니다.” 다시 임금이 묻되 “부처님께서 어떤 경지를 지나서야 이 열반의 세계에 이르게 됩니까?” 하였다. 대답하되 “부처님은 지나는 과정이 없으며, 마음도 또한 그대로일 뿐 경과함이 없습니다”하니, 재차 묻되 “짐이 하늘의 도움을 받아 란세를 구제하기 위해 흉폭한 무리들을 주살하였으니, 어떻게 하면 생민(生民)을 잘 보호할 수 있겠습니까?” 대답하되 “전하께서 오늘의 묻는 그 마음을 잊지 않으시면 국가가 부강하고, 생민(生民)이 매우 행복할 것입니다.” 또 임금이 묻되 “대사는 어떠한 덕행으로 중생을 교화하십니까?” 대답하되 “신승(臣僧)은 힘이 없어 자신을 구제함은 가능하지만, 어찌 감히 다른 사람의 결박을 풀어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때 왕은 옥음(玉音)이 낭랑하여 구름이 일어나는 듯한 질문을 꺼리지 아니하였고, 대사는 사변(四辯)이 물이 흘러가듯하여 걸림 없는 것이 마치 병에 물을 쏟아 붓는 것처럼 답하였으니 육조(六祖)스님의 뜻인 도(道)에 저촉하려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스님의 말씀은 (결락) 三道 (결락)라 하고, 지혜도 또한 (결락) 거지(去也)라 하였으니, 이상과 같이 문답한 것을 자세히 실으려면 글이 너무 번다해지므로 총괄하여 간략하게 기록하는 바이다. 엎드려 생각하노니 (결락) 이제 상(上)께서 (결락) 대왕(大王)의 위엄이 양요(兩曜)와 같고 설법하는 소리는 건곤(乾坤)에 미치며, 덕이 빼어나 두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백성을 다스리되 사당(邪黨)이 없게 하고, 오연(五衍)에 귀의하였으니, 어찌 중인도의 파사익왕이 삼보(三寶)를 존중한 것과 다르다고 하겠는가! 서천(西天)의 계일왕(戒日王)과 함께 정법(正法)으로 나라를 일으켜 세움과 동시에 문(文)을 닦고 근본을 심은 임금이니, 이와 같이 위대한 성군은 고금(古今)을 통하여 드물게 볼 수 있다고 하겠다. 대사(大師) (결락) 삼배(三拜)를 하고 물러가면서 흥왕사에 모시도록 명하였다. 그 후 황주원(黃州院) 왕욱(王旭) 낭관(郞官)이 멀리서 스님의 청풍(淸風)을 앙모하고 편지를 보내 제자가 되어 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자 희망한다고 하였다. 드디어 열반을 수년 앞두고 산간(山間)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의령(內議令) 황보숭(皇甫崇)과 태상(太常) 충양일감(忠良日監)이 대사의 공양구(供養具)를 살피되 마치 집시자(執侍者)와 같이 하므로 대사는 더욱 마음이 불안하였다. 어느 날 임금께 고하되 “사슴이 들판에서 자유롭게 놀 듯 산중에서 조용하고 편안하게 있도록 놓아 달라”고 간청하였다. “외람되어 어명을 받아 왕성(王城)으로 내왕하니 점차 정에 끌려 부자유함이 헌학(軒鶴)과 양제(梁鵜)로도 비유할 수 없나이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신승(臣僧)의 작은 생각을 가납하시어 구름처럼 고산에 돌아가서 마치 고기가 깊은 물에서 노는 것과 같이 하여 주시면 그 은혜 참으로 크다 하겠나이다”하였다. 이 같은 스님의 간청을 들은 왕은 허락하여 동리산(桐裏山)으로 돌아가게 하고 본도(本道)의 수상(守相)에게 명하여 전결(田結)과 노비를 헌납하여 향적(香積)을 제공토록 하였으며, 외호의 가풍(家風)을 잊지 아니하고 항상 팔연(八行)의 예를 펴서 돈독한 단월이 되어 불교의 보존과 유지의 의무를 받아서 각기 진뢰(陳雷)를 본받았다. 진실로 (결락) 舊分. 대사는 개운(開運) 2년전총(旃䝉) 대황락(大荒落) 2월 2일에 대중을 불러 놓고 말씀하되 “생(生)이란 유한한 것이며, 멸(滅) 또한 그 시기가 미정(未定)한 것이다. 내 이제 떠나고자 하니 각기 뜻있게 잘 살도록 하라. 부처님께서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는 곧 너희들의 위대한 스승이라’ 하였으니, 나도 또한 이 말씀으로 너희들에게 당부하노니 너희들이 이를 잘 준수한다면 내가 죽는 것이 아니다”하고 향을 피우고 염불을 하게 하고 합장하고 엄연(奄然)히 입적하니 속년(俗年)은 82세요, 승랍은 66이었다. 이 때 스님들은 통곡하면서 나루터의 다리와 큰 집의 들보가 이미 무너졌다 탄식하였고, 신백(神伯)들은 애통해 하면서 법륜(法輪)의 문이 영원히 닫혔다고 슬퍼하였다. 심지어 새들마저 답답해하고, 짐승들은 슬퍼하였을 뿐만 아니라 평소 귀를 시원하게 해주던 (결락) 잔잔하게 흐르는 석간수도 애성(哀聲)으로 변하였고, 다년간(多年間) 눈을 즐겁게 하던 산에 덮인 자욱한 구름도 모두 참담한 빛으로 변하였으며, 곤충과 식물들까지도 애통해 한 이 사실을 지필(紙筆)로 어찌 다 적을 수 있으리오. 당시의 이러한 기조(奇兆)를 왕에게 보고하였더니 임금이 본산(本山)에 대사의 탑을 세우게 하되, 경비는 모두 국고에서 부담하게 하고 역부(役夫)로는 부근 주민을 동원토록 하였다. 공사를 마치고 나니 장엄이 주밀(周密)하고 조탁(彫琢)도 매우 우아하였다. 상수문인(上首門人)들이 다시 조정에 건의하되 “선사신(先師臣) 아모가 다행하게 임금님의 도움을 입어 탑을 세웠으니, 국은(國恩)이 망극하여 생전과 사후에 걸쳐 함께 영광이오나 아직 탑에 따른 비명(碑銘)이 없어 선사께서 생전에 쌓은 도행(道行)이 점차로 (결락) 윤몰(淪沒)할까 두렵사오니 비를 세우도록 윤허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였다. 왕은 수비(樹碑)를 허락하시고 미신(微臣)인 저에게 비문을 지어 스님의 선화(禪化)를 의양(宣揚)토록 하라 명하셨으나, 소(紹)는 칠보시(七步詩)를 지을 만한 재주도 못되며 학문(學問)도 오거(五車)의 책도 읽지 못한 변변치 아니한 선비이므로 굳게 사양하였지만 마지못하여 주생(朱生)과 같이 근부(斤斧)를 잡고, 예씨(禰氏)를 칭찬하는 것이니 부득이하여 억지로 엮어 비문을 지었다. 명(銘)하여 가로되, 위대하신 태안사 광자대사여! / 진리의 방편을 요달하시고 / 깨치신 그 법문(法門) 심오하오며 / 지극한 그 이치 깊고도 깊네. / 그의 덕화(德化) 해동에 널리 전하고 / 도덕은 해가 뜨는 동국을 덮었네. / 자재한 그 행적 구름과 같고 / 지혜는 달빛이 맑은 물에 비치듯 / 파란(波瀾)과 이기(理氣)는 하늘을 찌르듯 / 평등한 그 마음 대원경(大圓鏡) 같아 / 갑자기 오늘에 열반하시니 / 어디서 다시 만나 선(禪)을 들으랴! / 계족산(鷄足山) 산중에서 열반하시니 / 운수(雲水)처럼 곳곳으로 행각(行脚)하다가 / 이곳을 열반지로 정하고 나서 / 지금까지 이곳서 정진하셨네. / 호랑이의 싸움을 그치게 하고 / 개미를 구제하듯 자비가 깊어 / 강설(講說)을 할 적에는 돌들도 경청하였고 / 나무도 그를 항해 점두(點頭)하였다. / 어느 날 꿈에 양영간(兩楹間)에 누었다가 / 신 한 짝만 남겨놓고 홀홀히 갔네. / 스님의 분상(分上)엔 설(說)할 만한 법 없건만, / 광자(廣慈)란 그 칭호가 있게 되었네. / 삼업(三業)은 청정하여 연꽃과 같고 / 육진(六塵)은 탕제(蕩除)되어 청량과 같아 / 행각(行脚)을 마치고 동리산(桐裏山)으로 돌아와 / 모든 대중 한 곳에 모아 놓고서 / 수발다라 비구가 최후법 듣는 듯 / 살타파륜이 법을 구함과 같도다. / 현묘(玄妙)한 그 말씀은 넓고도 깊어 / 대혜(大慧)의 지혜라야 헤아릴 수 있네. / 내 이제 피안(彼岸)에 오르려 하니 / 겁화(劫火)가 이내 몸을 태울 것일세. / 대중들은 우러러 쳐다보다가 / 하늘을 부르면서 애통하였네. / 이 비석 영원토록 우뚝 솟아서 / 만세(萬歲)가 지나도록 상하지 않고 / 영원히 이 비문도 남아 있기를 / 애오라지 비명(碑銘)을 기록하노라. 광덕(光德) 2년 세차 경술 10월 15일 세우고, 문민(文旻)이 글자를 새기다.

有唐高麗國武州故桐裏山大安寺敎諡廣慈大師碑銘幷序太相前守禮賓令元鳳令兼知制誥上柱國賜紫金魚袋臣孫紹奉敎撰沙粲▨▨▨▨監▨賜緋魚(以下缺)若夫擊虛發響苟應就悟之能取實藏聲豈是處迷之術門縱濶而不可得進岸雖明而難以獲逾至理在中守株者無定見性眞宗非外窺管者莫以傳心曩植曠刧之道芽方鑄多生之法器是以運開一千甲子始遇聖明歷周五百星霜再逢賢哲或禀七淨而傑出或蘊十智以挺生自古旣稀至今爲貴兩全雙美者卽我大師也大師法諱允多字法信京師人也其祖考等皆族盛簪纓以傳孝義家記而亂來抛墜聲譽而耳口聞言其妣朴氏受性溫和爲人貞潔自幼未甞於俗未長(以下缺)經勤修於佛事迨其岳降分娩等閒由孝感而易爲苦霜菫之出疾是以咸通五年四月五日誕生大師初放蓬矢之日雙柱絶倫將辭襁褓之秊三亭轉麗遨(以下缺)遊而居定有方禮度而顚沛無墜扇枕之令譽早著鄕閭搥灰之捷詞夙馳遐邇春秋纔當八歲有志三歸遽告二親願別蝸門要投禪敎父母益爲鞠養倍 (以下缺)前猶是縈紆未能允許大師潛然曰出家脩道利益不無直饒翁子之錦衣定勝山僧之毳衲哀鳴重沓諮告再三深認盛情固難橫奪登時一諾明日辭膝下(以下缺)步而雲遊四海行駐唯伴弧影炎涼倏歷數年自此周迴跋涉於遼東迤邐遠詣於桐裏叅覲和尙頫相面目顧盻形容數日後侍奉上方和尙曰(以下缺)古語心專石可穿志切泉俄涌道非身外卽佛在心宿習者覺於刹那蒙昧者滯在萬刧如來說諭爲精鈍則再語爲根利則略言汝身好看心在吾說也汝自(以下缺)於伽耶岬新藪受具後但繫心猿無縱意馬戒甁方挈油不欹不偏志於書宵綱砥心於瞬息不戶不牖見大道不崑不海得神珠芳聲旣震於四法侶遠自於八表(以下缺)法祖西堂傳於徹徹傳於先師如如傳於吾師卽 西堂曾孫也大師傳法化於西堂郤不勞於西學割世緣於東城眞▨實際本空(以下缺)善誘於東人學無學之宗終資祇夜師無師之旨必籍修多遂使弄一心者大信一音纏九結者漸海九業多多方便而引導輕輕威力而折摧化緣周於鯷岑蹤(以下缺)跡徧於桃野不忘其本卻歸故山纔經兩宵忽有山賊入寺擬刼衣物直到上方大師遌然而無銎不動禪座被威鋒之辞惡扶慧刄之降魔賊徒無(以下缺)衝突大師自無罪過言訖禮拜走數見此模様不免思惟至夜化夢有一戰將入於殿內見勿它那七軀末座向大師書(以下缺)是量忍兩字而已睡覺驚訝起來盬嗽端坐偶言曰也大奇也大奇白日狐疑了不料淸宵蝶夢成古人有言一忍得長樂者一忍住世久好重忍兩字豈徒然(以下缺)哉大師因此永獲安禪久居僧寺▨▨▨▨▨▨▨▨黃波▨如而洞達禪源超然聖言離聲色裏出是非關衲子盈(以下缺)門慕義投仁雲趍霧聚叅禪學道虛届實歸孝宗大王趨向谷風遐飛綸翰願開慧眼以祐國祚于時羅運傾否兵火頻起弓裔亂紀甄萱盗名天命有歸國朝新造(以下缺)背▨梗狼煙往來辛苦於沙門裨▨終無於王神聖大王乘時聖望主閒代明君富安邦撫俗之宏機通護法契理之神術萬機之暇留心玄門自微時飽聆大師之聲價因遣郎官賷御札入山而請曰仰德日久願接梵儀師已老矣恐難行脚何妨騎乘一詣九重大師曰老僧由來未甞騎馬至於齡年山僧亦是王民何敢方命以錫杖芒鞋步至輦下上大喜令止儀賓寺安頓數日後召入上殿勿趨上下床接之待以賓禮群臣竦然上問曰古師云心卽佛是心如何大師答曰若到槃者不留於佛心問佛有何過卽得必此 答曰佛非有過心自無過問曰朕受天之佑救亂誅暴何以則生民保乂對曰殿下不忘今日之問國家幸甚生民幸甚問曰大師以何德行化遵衆生對曰臣僧自救可了何敢解脫他縛此日玉音琅琅不憚雲興之問大師四辯亹亹無碍甁瀉之答云六祖意不欲得觸道然師語▨了道▨慧亦▨去也若具載文繁括而略錄伏念▨今上大王威齊兩曜講沙而道叶乾坤德秀重曈治民而令無邪黨歸依五衍豈異於中印匿王尊仰三禪有用於西天戒日正法興邦之代修文植本之君尊美斯今罕見振古大師三禮而退命安置興王寺黃州院王旭郎官遙仰淸風平傳尺牘願爲弟子冀效從師遂寂滅而數年山間而復况內議令皇甫崇太常忠良日監大師之供饋如執侍者之職大師益不安一日諗于上曰麋鹿野縱甘伏丘壑猥承御命來住王域恐懼情深軒鶴梁鵜未足喩也伏望許從微情俾雲歸古山魚游深壑爲賜大矣上許之令歸桐裏古山命本道守相畫給田結奴婢以供香積不忘外護之風每展八行之禮仍爲壇越久受保持各效陳雷允▨舊分大師至開運二年荒落爲辜二月二日召衆有言曰生也有限滅而未定吾今欲行各官珍重佛言波羅提木又是汝大師吾亦以此言囑汝汝等遵行吾不死矣令焚香念佛合掌奄然而逝俗秊八十二僧臘六十六於是緇流號慟歎津樑之已摧禪伯咨嗟見法輪之永閉至於飛禽憫然走獸悽愴平日爽耳之(以下缺)潺湲㵎水變作哀聲多年悅耳之靉靆山雲皆成慘色感動蠢植毫楮焉周遂以其時事申聞尋蒙朝令建塔本山財出官廩役以近民莊嚴周密彫琢甚妙上首門人等復告于朝曰先師臣某幸蒙知遇國恩罔極生死俱榮而塔上之銘闕焉恐先師臣平日樹立之道行漸(以下缺)至淪沒伏乞睿澤▨從許樹豐碑者爰命微臣延揚禪化紹才非七步學昧五車直言而否歎朱生斤斧而有禰氏事不獲已抑綴爲文銘曰偉哉開士了達眞筌法門杳杳至理玄玄化符海外道冠日邊雲歸深洞月落澄淵波瀾意氣平等心田今朝示滅何處談禪雞山岫煩不水逶迤土地有緣棲遲在斯解虎道崚救蟻恩垂石臻聽講樹向來儀兩楹忽夢隻履俄遺無法可說有稱廣慈淸淨三業蕩除六塵歸於桐裏際會金人依化提拔彷彿波輪玄談浩瀚大慧精神將登彼岸刼火焚薪介衆安仰哀號蒼旻可久可大萬歲不磷爰述不朽聊記貞珉光德二年歲次庚戌十月十五日立 鐫字文旻

☞윤다(尹多) ☞법신(法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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