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세기 세종공 전 : 미추대왕(味鄒大王)이 광명을 황후로 삼으며 후세에 알려 말하기를 ‘옥모(玉帽)의 인통(姻統)이 아니면 곧 황후로 삼지 말라’고 하였다. 까닭에 세상에서 이 계통을 진골정통(眞骨正統)이라 한다. 옥모부인(玉帽夫人)은 곧 소문국(召文國)의 왕녀인 운모공주(雲帽公主)가 구도공(仇道公)에게 시집가서 낳은 사람이다. 옛날부터의 진골(眞骨)이 아니다.
삼국사기 권 제2(신라본기 제2) 아달라니사금본기 : 19년(172) 봄 정월에 구도(仇道)를 파진찬으로 삼고 구수혜(仇須兮)를 일길찬으로 삼았다. 2월에 시조묘에 변고가 있었다. 서울에 돌림병이 크게 번졌다.
삼국사기 권 제23(백제본기 제1) 초고왕본기 : 25년(190) 가을 8월에 군사를 내서 신라의 서쪽 국경의 원산향(圓山鄕)을 습격하고 나아가 부곡성(缶谷城)을 포위하였다. 신라 장군 구도(仇道)가 말탄 군사[馬兵] 500명을 거느리고 막았다. 우리 군사가 거짓 퇴각하자 구도가 와산(蛙山)까지 추격하여 오므로 우리 군사가 되돌아 쳐서 크게 이겼다.
삼국사기 권 제2(신라본기 제2) 벌휴니사금본기 : 2년(185) 2월에 파진찬 구도(仇道)와 일길찬 구수혜(仇須兮)를 임명하여 좌우군주(左右軍主)로 삼아 소문국(召文國)을 정벌하였는데, 군주의 이름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5년(188) 봄 2월에 백제가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해왔으므로 파진찬 구도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막게 하였다.6년(189) 가을 7월에 구도가 백제와 구양(狗壤)에서 싸워 이겨 5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7년(190) 가을 8월에 백제가 서쪽 국경에 있는 원산향(圓山鄕)을 습격하였다. 또 진군하여 부곡성(缶谷城)을 에워쌌으므로 구도가 굳센 기병 500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니 백제의 군사가 거짓으로 달아났다. 구도가 뒤쫓아가 와산(蛙山)에 이르렀다가 백제에게 패하였다. 왕은 구도가 실책하였다 하여 부곡성주(缶谷城主)로 좌천시키고 설지(薛支)를 좌군주(左軍主)로 삼았다.
삼국사기 권 제2(신라본기 제2) 미추니사금본기 : 미추니사금(味鄒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미추(味鄒)를 미조(味照)라고도 한다> 성은 김씨이다. 어머니는 박씨로 갈문왕 이칠(伊柒)의 딸이고, 왕비는 석씨 광명부인(光明夫人)으로 조분왕 딸이다. 그의 선조 알지(閼智)는 계림에서 났는데 탈해왕이 데려다가 궁중에서 키워 후에 대보(大輔)로 삼았다. 알지는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은 아도(阿道)를 낳았으며,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보(郁甫)를 낳았다. 그리고 욱보는 구도(仇道)를 낳았는데 구도는 곧 미추왕의 아버지이다. 첨해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미추를 왕으로 세웠다.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갖게 된 시초이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 제1 김알지(金閼智) : 알지는 열한(熱漢)을 낳고 열한은 아도(阿都)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는 구도(俱道; 혹은 구도仇刀)를 낳고, 구도는 미추(未(味)鄒)를 낳으니 미추(未鄒)가 왕위에 올랐다. 이리하여 신라의 김씨(金氏)는 알지에서 시작된 것이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13대 미추니질금(未鄒尼叱今)은 미소(味炤)라고도 하고 미조(未祖)라고도 하며 미소(未召)라고도 한다. 성은 김씨인데 (김씨로는) 처음 즉위했다. 아버지는 구도(仇道) 갈문왕이다. 어머니는 생호(生乎)인데 술례부인(述禮夫人)이라도도 하니, 이비(伊非) 갈문왕 딸이다. 박씨다. 비는 제분왕(諸賁王) 딸인 광명랑(光明娘)이다. 임오년에 즉위해 22년간 다스렸다.
삼국사기 권 제2(신라본기 제2) 미추니사금본기 : 2년(263) 봄 정월에 이찬 양부(良夫)를 서불한으로 삼고 중앙과 지방의 군사 일을 겸하여 맡게 하였다. 2월에 몸소 국조묘(國祖廟)에 제사지내고 크게 사면하였다. 죽은 아버지 구도(仇道)를 갈문왕으로 봉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3(신라본기 제3) 내물니사금본기 즉위년 : 나물니사금(奈勿尼師今)<나물(奈勿)을 나밀(那密)이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다. 성은 김씨로, 구도(仇道) 갈문왕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말구(末仇) 각간이다. 어머니는 김씨 휴례부인(休禮夫人)이고 왕비는 김씨로 미추왕의 딸이다. 흘해왕(訖解王)이 죽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물이 왕위를 이었다.<말구와 미추 이사금은 형제이다>사론(史論): 아내를 맞이함에 있어 같은 성씨를 취하지 않는 것은 분별을 두터이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노공(魯公)이 오(吳)나라에 장가들고 진후(晉侯)가 사희(四姬)를 취한 것을 진(陳)나라의 사패(司敗)와 정(鄭)나라의 자산(子産)이 그것을 매우 나무랬다. 신라의 경우에는 같은 성씨를 아내로 맞이할 뿐만 아니라 형제의 자식과 고종·이종 자매까지도 모두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다. 비록 외국은 각기 그 습속이 다르다고 하나 중국의 예속(禮俗)으로 따진다면 도리에 크게 어긋났다고 하겠다. 흉노(匈奴)에서 그 어머니와 아들이 상간(相姦)하는 경우는 이보다 더욱 심하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17대 나물마립간(奈勿麻立干)은 □□왕이라고도 한다. 김씨다. 아버지는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인데 미소왕(未召王) 동생인 (미구.未仇) 각간이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휴례부인.休禮夫人)인데 김씨다. 병진년에 즉위해 46년을 다스렸다. 능은 점성대(占星臺) 서남쪽에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