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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김품석(金品釋)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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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 사위로서 선덕왕 11년(642), 이찬이자 대야성 도독으로 있다가 백제군 침략에 성은 함락되고 그 자신도 부인 고타소와 함께 죽었다. 

삼국사기 권제5(신라본기 제5) 선덕왕 : 11년(642) 봄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7월에 백제 왕 의자(義慈)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나라 서쪽 40여 성을 쳐서 빼앗았다. 8월에 또 고구려와 함께 모의하여 당항성을 빼앗아 당나라와 통하는 길을 끊으려 하였으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 [당] 태종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이 달에 백제 장군 윤충(允忠)이 군사를 이끌고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도독 이찬 품석(品釋)과 사지(舍知) 죽죽(竹竹)·용석(龍石) 등이 죽었다. 겨울에 왕이 장차 백제를 쳐서 대야성에서의 싸움을 보복하려고 하여,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 군사를 청하였다. 처음 대야성이 패하였을 때 도독 품석의 아내도 죽었는데, 이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가 이를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 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얼마가 지나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 하고는, 곧 왕을 찾아 뵙고 “신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게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라 말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삼국사기 권제47 (열전 제7) 죽죽 : 죽죽(竹竹)은 대야주 사람이다. 아버지 학열(郝熱)은 찬간(撰干)이 되었다. 죽죽은 선덕왕 때 사지(舍知)가 되어 대야성도독 김품석(金品釋) 휘하에서 보좌역을 맡고 있었다. 왕 11년 임인(백제 의자왕 2: 642) 가을 8월에 백제 장군 윤충(允忠)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그 성을 공격했다. 이보다 앞서 도독 품석이 막객(幕客)인 사지(舍知) 검일(黔日)의 아내가 예뻐 이를 빼앗았으므로 검일이 한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이 때에 이르러 백제군과 내응해 그 창고를 불태웠으므로 성중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굳게 막지 못하였다. 품석의 보좌관 아찬 서천(西川)<또는 사찬(沙) 지삼나(祗彡那)라고도 한다>이 성에 올라가 윤충에게 소리치기를 “만약 장군이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면 원컨대 성을 들어 항복하겠다!” 하니 윤충이 말하기를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대와 더불어 우호를 함께 하겠다. 그렇지 않을 경우 밝은 해를 두고 맹서하겠다!” 하였다. 서천이 품석 및 여러 장수에게 권하여 성을 나가려 하니, 죽죽이 말리며 말했다. “백제는 자주 번복을 잘하는 나라이니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윤충의 말이 달콤한 것은 반드시 우리를 유인하려는 것으로 만약 성을 나가면 반드시 적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쥐처럼 엎드려 삶을 구하기보다는 차라리 호랑이처럼 싸우다가 죽는 것이 낫습니다.” 품석이 듣지 않고 문을 열어 병졸을 먼저 내보내니 백제의 복병이 나타나 모두 죽였다. 품석이 장차 나가려 하다가 장수와 병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처자를 죽이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죽죽이 남은 병졸을 모아 성문을 닫고 몸소 대항하니 사지(舍知) 룡석(龍石)이 죽죽에게 말하기를 “지금 군대의 형세가 이러한데 반드시 온전할 수 없다. 항복하여 살아서 후일을 도모함만 같지 못하다.” 하니, 답하기를 “그대의 말이 합당하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가 나를 죽죽이라고 이름지어 준 것은 나로 하여금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절조를 지켜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말게 한 것이니 어찌 죽음을 두려워 하여 살아서 항복하겠는가?” 하였다. 드디어 힘써 싸워서 성이 함락되자 용석과 함께 죽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죽죽에게는 급찬, 용석에게는 대나마 관등을 내리고 처자에게 상을 내려 서울로 옮겨 살게 했다. 

삼국사기 권제5(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 7년(660)...8월 2일에 주연을 크게 베풀고 장병들을 위로하였다. 왕과 정방(定方) 및 여러 장수들은 대청마루 위에 앉고, 의자왕과 그 아들 융(隆)은 마루 아래 앉혀서 때로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들이 목메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날 모척(毛尺)을 붙잡아 목베었다. 모척은 본래 신라 사람으로서 백제에 도망한 자인데, 대야성의 검일(黔日)과 함께 도모하여 성이 함락되도록 했기 때문에 목벤 것이다. 또 검일을 잡아 [죄목을] 세어 말하였다. 네가 대야성에서 모척과 모의하여 백제 군사를 끌어들이고 창고를 불질러 없앰으로써 온 성 안에 식량을 모자라게 하여 싸움에 지도록 하였으니 그 죄가 하나요, 품석(品釋) 부부를 윽박질러 죽였으니 그 죄가 둘이요, 백제와 더불어 본국을 공격하였으니 그것이 세번째 죄이다.이에 사지를 찢어 그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삼국사기 권제28(백제본기 제6) 의자왕 : 2년(642)...8월에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공격케 했다. 성주 품석(品石)이 처자와 함께 나와 항복하자 윤충이 모두 죽이고 그 머리를 베어 왕도(王都)에 전하고,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아 나라 서쪽 주·현(州縣)에 나누어 살게 했다. 군사를 남겨 두어 그 성을 지키게 했다. 왕은 윤충의 공로를 표창하여 말 20필과 곡식 1천 섬을 주었다. 

삼국사기 권제41(열전 제1) 김유신上 : 선덕대왕 11년 임인(642)에, 백제가 대량주(大梁州)를 격파하였을 때, 춘추공(春秋公)의 딸 고타소랑(古陀炤娘)이 남편 품석(品釋)을 따라 죽었다. 춘추가 이를 한으로 여겨, 고구려에 청병하여 백제의 원한을 갚으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춘추가] 장차 떠나려 할 때 유신에게 말하였다. “나는 공과 한 몸이고 나라의 팔다리이다. 지금 내가 만약 저 곳에 들어가 해를 당하면, 공은 무심할 수 있겠는가?” 유신이 말하였다. “공이 만일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저의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백제 두 임금의 뜰을 짓밟을 것이다. 진실로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나라 사람을 대할 것인가?” 춘추가 감격하고 기뻐하여 공과 더불어 함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마시며 맹세하여 말하였다.“내가 날짜를 계산하여 보건대 60일이면 돌아올 것이다. 만약 이 기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다시 만나 볼 기약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서로 작별하였다. ...진덕왕 태화(太和) 원년 무신(648)에... 그때 유신은 압량주 군주(軍主)로 있었는데 마치 군사에 뜻이 없는 것처럼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놀며 몇 달을 보내니, 주(州)의 사람들이 유신을 용렬한 장수라고 생각하여 헐뜯어 말하기를 “뭇 사람이 편안하게 지낸 지가 오래되어 남는 힘이 있어 한번 전투를 해봄직한 데 장군이 용렬하고 게으르니 어찌할 것인가.” 하였다. 유신이 이 말을 듣고 백성을 한 번 쓸 수 있음을 알고는 대왕에게 고하였다. “이제 민심을 살펴보니 전쟁을 치룰 수 있습니다. 청컨대 백제를 쳐서 대량주 전쟁에 대한 보복을 합시다!” 왕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건드렸다가 위험을 당하면 장차 어떻게 하겠소?” 하니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전쟁의 승부는 대소에 달린 것이 아니고 인심이 어떤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紂)에게는 수많은 백성이 있었으나 마음과 덕이 떠나서 주(周)나라의 10명의 신하가 마음과 덕을 합친 것만 같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백성은 뜻을 같이하여 생사를 함께 할 수 있는데 저 백제는 두려워할 바가 못됩니다.” 왕이 이에 허락하였다. 주의 군사를 선발 훈련시켜 적에게 나가게 하여 대량성(大梁城)[현재의 경남 합천]에 이르니 백제가 맞서 대항하였다. 거짓 패배하여 이기지 못하는 척하여 옥문곡(玉門谷)까지 후퇴하니 백제측에서 가볍게 보아 대군을 이끌고 왔으므로 복병이 그 앞뒤를 공격하여 크게 물리쳤다. 백제 장군 여덟 명을 사로잡고 목베거나 포로로 잡은 수가 1천 명[級]에 달하였다. 이에 사신을 백제 장군에 보내 말하였다.“우리의 군주(軍主) 품석과 그의 아내 김씨의 뼈가 너의 나라 옥중에 묻혀 있고, 지금 너희의 부장 여덟 명이 나에게 잡혀 있어 엎드려 살려달라고 하였다. 나는 여우나 표범도 죽을 때에는 고향으로 머리를 돌린다는 말을 생각하여 차마 죽이지 못하고 있다. 이제 그대가 죽은 두 사람의 뼈를 보내 산 여덟 사람과 바꿀 수 있는가?”  백제의 좌평 중상(仲常)<또는 충상(忠常)이라고도 썼다.>이 왕에게 아뢰었다.“신라인의 해골을 남겨 두어도 이로울 바가 없으니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만약 신라인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우리의 여덟 명을 보내지 않는다면 잘못이 저쪽에 있고, 곧음이 우리 쪽에 있으니 어찌 걱정할 바가 있겠습니까?” 이에 품석 부부의 뼈를 파내어 관에 넣어 보냈다. 유신이 말하기를 “한 잎이 떨어진다고 하여 무성한 수풀이 줄어들지 않으며, 한 티끌이 쌓인다고 하여 큰 산이 보태지는 법이 아니다.” 하고는 여덟 사람이 살아 돌아가도록 허락하였다. 드디어 승리의 기세를 타고 백제의 영토에 들어가 악성(嶽城) 등 12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2만여 명을 목베고, 9천 명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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