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論文을 안 쓰고 주석註釋을 안달아서 일어났던 여러 이야기들,
(가방끈이 짧아서 겪었던 일들)
2000년 4월 <지워진 이름 정여립>이 단행본으로 나오자 전주의 <JTV방송국>에서 <지워진 이름 정여립>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방영했다.
반역자로 몰려서 족보에서조차 지워진 이름 정여립이 조선 최대의 역모사건인 기축옥사를 통해 새롭게 재조명된 것이다.
그로부터 2년 뒤쯤 서울 kbs에서 <지워진 이름 정여립>을 모티브로 역사스페셜을 촬영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선생님의 책을 바탕으로 다큐를 제작할 것입니다.”
모 pd가 이렇게 제안했고, 그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고 일주일 동안을 내가 답사했던 전국의 정여립의 현장을 답사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감회가 새로웠다. 내가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공부했던 책을 배경으로 펴냈던 ’정여립‘ 이라는 인물이 이 나라에 새롭게 조명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가슴이 벅찼던지,
<역사스페셜>이 방송되는 날이었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TV를 보니 정작 나는 주변 인물로만 처리되고, 다른 사람들의 인터뷰만 나오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방영했던 것이다.
방송이 끝나갈 무렵 큰 애가 나에게 물었다.
“아빠는 언제 나와요”
나는 할 말을 잃었었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대학교를 다니지 않았으니까 전공도, 학위도 없지, 세상에 내놓을 만한 직함도 없지, 그때 가족들이 기대 섞인 눈으로 방송을 보고 있다가 방송이 그렇게 끝나자 서운해 하던 모습은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모습 중의 하나다.
부지런히 공부하고 글을 쓰자. 내가 나에게 한 다짐이었다.
그 뒤 2006년 4월에 서울 kbs에서 <TV 책을 말하다>에서 신정일의 <다시 쓰는 택리지>가 채택되어 일주일 동안의 촬영 뒤에 전국으로 방영된 뒤, 그 사람을 서울의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났다.
“오랜만입니다. 선생님”
나는 말했다.
“그렇게 살면 안되지요?”
’작가‘에 대한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는 그런 사람이 서울의 모 방송국의 대표로 청문회도 나오는 것을 보면 이 세상은 그런 사람들이 대를 이어 득세하는 세상이라는 것을 실감할 뿐이다.
그 뒤 모 방송국에서 <기축옥사와 정여립>을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나는 당연히 그 세미나에 초청되지 못했다. 그것 역시 그럴 수도 있지, 하고서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 세미나에 참석했던 어떤 분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참으로 황당하기만 했다.
세미나 중에 그분이 공개질의를 했다고 한다.
“<정여립과 기축옥사>에 대해서만큼은 <황토현문화연구소>의 신정일 선생이 가장 오래 공부를 했고, 유일하게 정여립을 주제로 한 책도 냈으며 방송까지 나왔는데, 왜 신정일 선생은 이 세미나에 초청하지 않았지요?“
그 말을 들은 세미나를 기획한 모 교수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신정일씨는 책에다 주석을 달지 않는 사람이거든요.”
그래, 나는 그 중요한 주석을 달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논문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석註釋이란 무엇일까? <국어사전>에 “본문本文 중의 낱말이나 어구語句의 뜻을 알기 쉽게 풀이함, 주해註解라고도 부름“ 이라고 실려 있다.
그렇다면 책에서 주석이 그렇게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일까?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인 쇼펜하우어는 <인생을 생각한다.>라는 글에서 그 주석을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넓은 의미에서 인간의 일생은, 처음 40년 동안은 인생의 본문을 쓰는 시기이고, 그 다음 30년은 이 본문에 대한 주석을 달아가는 시기다. 이 주석은 인생이 갖는 진정한 의미와 맥락을 알려주는 동시에 인생이 내포하고 있는 교훈이며, 미묘한 뉘앙스들을 확실하게 이해시켜 분다.”
주석은 인생을 살 만큼 살고, 삶의 의미를 터득한 뒤에 쓸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한 글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살아보지도 않은 채, 오로지 책을 위한 주석에 또 다른 주석을 다는 것과 같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표상> 중 ‘책과 독서’에서 잘못된 주석의 폐해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사상이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면 우리들의 사상은 제약되고 억압당하지 않을 수 없고, 결국은 사고력이 마비될 것이다. (중략) 대부분의 학자의 독서열은 정신의 빈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사상을 받아들여야 하는 일종의 진공의 흡인력이다. (중략) 어떤 문제에 대해 스스로 사색하기 전에 남의 글을 읽는 것은 위험하다. 남의 글을 읽을 때,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신해 생각하고 우리는 그의 정신적 과정을 반복할 뿐이다. (중략) 그러므로 하루의 대부분을 독서로 보내는 사람은 점차적으로 사고력을 잃게 된다. 자신의 경험은 말하자면 원문原文이고, 반성과 지식은 주석이라고 할 수 있다. 반성과 지식은 많고 경험이 적은 것은 페이지마다 본문은 2행뿐인데. 주석은 40행이나 되는 책과 같다.(...)
오직 원저자로부터만 우리는 철학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므로 철학에 마음이 끌리는 사람은 원저자라는 교요한 성소에서 불멸의 스승을 찾아야 한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것은 책보다는 생활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고, 둘째 주석보다 본문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와 비슷한 견해를 피력했던 사람이 몽테뉴였다.
“우리는 사물을 해석하기보다도 해석을 해석하는데 더 일이 많으며, 책을 놓고 쓴 책이 다른 제목을 놓고 쓴 것보다 더 많다. 우리는 언제까지 서로 주석하는 짓 밖에는 하지 않는다. 모든 일은 주석으로 웅성거린다. 진짜 작가는 드물다.“
요즘 책들은 조금 덜하지만 예전에 쓰여진 책들을 보면 본문보다 주석이 더 많은 듯 싶은 책들이 수없이 많았고, 그래야만이 다른 사람들에게 공부를 많이 한 것으로 보이는 것으로 알았다.
“주자는 일찍이 경전을 해석하는 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차라리 모르게 할지언정 넘쳐서는 안 되며, 차라리 서툴게 할지언정 번지르르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이 두 마디 말은 경전에 주석을 다는 사람에게 큰 교훈이 되고, 경전을 풀이하는 사람에게 지침이 될 만하다. 훗날 독서하는 자는 마땅히 명심하여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담헌 홍대용의 말이다.
그 뒤로도 나는 그와 비슷한 일을 많이 겪었다. 여러 사람의 학자들로부터 가끔씩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선생님은 논문을 안 써봐서 글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 논문을 써 봐야 한다.”
그 말은 논문도 안 써 본 사람이 무슨 글을 쓰느냐 일 수도 있고, 자기들이 논문을 쓰면서 얼마나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서 공부를 했는가를 은연중에 드러내는 말이기도 했다. 그 말은 맞다.
나는 논문을 쓰지 않았다.
박사는커녕 석사, 아니 학사 논문 한 편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쓸 필요가 없었다.
내가 어떤 직장에 취직을 할 일도 없었고, 학교에 적을 둔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오랫동안 전공분야를 공부할 때 수만 권의 다채로운 책을 읽고, 세상을 걷고 편력하면서 공부를 했다.
이 모든 것이 가방끈이 짧았기 때문에 견디어 낼 수밖에 없던 인생의 과정이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닫힌 학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내 인생의 행운이었다.
다 지난 일인데 가끔씩 그런 일들 때문에 웃음이 나올 때가 있다. 서글픈 웃음이,
2001년 4월 16일, 금요일.
***
신정일 선생 글이다. 저 교수 새끼 하는 말 봐라.
글다운 글이라곤 써 본 적도 없고 쓸 줄도 모르는 개새끼가 선생질하고 자빠졌다.
주석 있는 글?
웃기고 자빠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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