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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 이야기/마왕퇴와 전국 초묘 미라

[마왕퇴와 그 이웃-16] 마왕퇴를 증오한 강청

by 초야잠필 2025.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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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중인 마왕퇴 유물. 기록 사진이나 영화에는 묵묵히 발굴하는 사람들의 모습만 찍혀 있지만 이 무덤처럼 정치적 동란에 말려들어 시종일관 시끄러웠던 발굴도 없다. 중국 정치의 바람이 조금만 이상하게 불면 이 발굴현장에는 언제 홍위병이 쳐들어 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할 것이다

 
사인방은 마왕퇴와 상극에 있다. 

처음 마왕퇴에서 어마어마한 전한 시대 무덤이 발견되었단 보고가 올라간 당시, 

이 보고를 받고 그까짓 건 아무것도 아니니 그냥 태워버리라고 일갈한 것은

강청을 위시한 사인방이었다. 

전한 시대 무덤이라고 해도 결국 반동적 지주계급 유산일 뿐이니

문화혁명의 와중에 있는 중국으로선 그딴 것 보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긴 공자묘도 작살내는 판에 마왕퇴를 왜 보존하겠는가. 

이렇게 태워버리라는 명령을 뒤집어 버린 건 당시 총리 주은래였다. 

주은래와 곽말약은 마왕퇴 발굴이 진행되는 동안 이 발굴이 공격받지 않도록 계속 보호하는 역할을 했는데 

이들 역시 사인방에 의해 호시탐탐 공격받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에서 

마왕퇴를 보호하는 일은 아무리 주은래와 곽말약이라고 해도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마왕퇴는 처음에는 중소분쟁 때문에 핵 방공호를 파다가 우연히 발견되었고

그 후 발굴하는 과정에서는 홍위병과 사인방, 그리고 주은래, 곽말약 등 소위 "주자파"들의 정치 싸움의 상징물처럼 되어 버렸다. 
 

재판정에 선 사인방

 
오늘날에는 마왕퇴는 그 찬란한 유물로만 대중에 기억되고 각인하지만 

이 무덤은 발굴 당시까지만 해도 찬란한 유물 못지 않게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치적 동란과 함께 호흡하는 형국이었으니

나름 기구한 팔자였다고 할 것이다. 

문화대혁명, 그리고 그 전방위 행동대원들로서의 홍위병 뒤에 언제나 어른어른하는 사인방四人幫이란

모택동 지원 혹은 묵인 아래 이 사상 정풍 운동을 주도한 당시 중국공산당 권력 핵심 넷을 말하거니와 

구체로는 모택동 부인 강청江青을 필두로 정치국위원 요문원姚文元,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왕홍문王洪文, 정치국 상임위원 겸 국무원 부총리 장춘교張春橋를 말한다.

이들은 모택동이 사망한 직후 1976년 9월, 긴급체포되고 일망타진되면서 문혁도 그 기나긴 흑역사가 마침내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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