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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 이야기/마왕퇴와 전국 초묘 미라

[마왕퇴와 그 이웃-15] 조사단이 두려워한 홍위병

by 초야잠필 2025.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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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죄가 없고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는 마오의 주장에 따라 홍위병은 공자묘를 때려 부수었다. 마왕퇴 발굴단도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홍위병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앞에서 홍위병과 마왕퇴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마왕퇴 발굴이 있던 1971-1974년 연간에는

아직 홍위병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고, 

여전히 중국 정계를 휘두르던 사인방은 

심지어는 주은래와 곽말약까지도 수정주의자 내지는 주자파 딱지를 붙여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발굴단은 주은래 재가를 받아 마왕퇴 발굴을 시작했지만 

이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 역시 홍위병이었다. 
 

 
이 때문에 발굴 당시 채증한 카메라 필름은 모두 셋으로 나누어

하나는 중국과학원, 다른 하나는 호남성박물관, 또 하나는 호남성 도편사 세 군데에 따로 보관하게 했다. 

말하자면 우리 조선왕조실록처럼 여러 군데 나누어 보관하여 

한 군데가 홍위병 습격으로 기록이 사라져도 다른 두 군데만 온전하면 복구가 가능하게 하였던 것이다. 

마왕퇴 발굴단이 가장 두려워 한 것은

위로는 사인방으로 대표되는 문혁의 주동자들, 

그리고 아래로는 이들에 의해 사주되어 주자파를 습격하는 홍위병들이었다. 

마왕퇴 발굴은 이런 와중에 행해지고 있던 것이니

범상치 않은 조건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해야겠다. 

그만큼 홍위병은 좀비였다.

아니 좀비보다 더 무서운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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