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단장님과 지난번 통화를 하다가
팽융상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때 팽융상 정보를 주면 찾아보겠노라고 했다.
오늘 올라온 팽융상 정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사실 필자도 나름 팽융상 선생 프로필을 찾기 위해 노력했었는데 정보는 물론 이 양반 생사 여부도 알 수 없는 터였다.
역시 언론인은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팽융상 선생이 최근 모습을 드러낸 학회가
호남박물원에서 개최된 마왕퇴 발굴 기념 50주년 학회였던 모양인데
이 학회는 필자도 참석 계획을 세웠었는데 일이 바빠 가지를 못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아마 등단했던 모양으로 선생의 모습을 보니 90에 가까와 보인다.
다시 시간을 70년대 마왕퇴의 시대로 돌아가보면,
팽융상 선생은 마왕퇴 보존 및 연구를 위해 중국 의학자들의 회의가 진행되던 당시
누가 그러면 마왕퇴 미라를 부검하겠는가, 라는 의제에 이르자
아무도 지원하지 않았으니 이는 어찌 보면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사실 의학자들에게 있어 미라 연구란 그 기본동력은 역시 학술적 호기심으로
이 호기심을 제외하고 나면 다른 동기가 크지 않고
특히 당시 중국의 정치적 상황을 생각하면 마왕퇴 미라를 주도적으로 조사하고 부검까지 하겠다고 자원하는 것은
잘해야 본전인 일이라고 하겠다.
앞에서 김단장께서 올리신 바와 같이 팽선생은 호남의대를 졸업 한 후 모교에 남아
처음에는 조직학교실에서 일을 하다가
나중에 병리학으로 바꾼 모양이다.
조직학교실이란 원래 해부학의 한 분과로 국내에서는 몇개 의대를 제외하면 거의 해부학교실에서 전담한다.
선생이 조직학교실에서 근무하다 병리학교실로 옮겼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육안적 분석 및 현미경적 분석에 모두 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마왕퇴 연구가 육안분석 및 현미경적 분석, 방사선학적 분석 등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던 것을 보면
연구의 전 과정에서 팽 선생이 깊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양반은 김단장께서 올리신 중국 쪽 설명을 보면,
1972年12月 14日参与解剖马王堆女尸,解剖古尸后,彭隆祥逐渐组织病理学的研究方向调整为古病理学研究。此后,国际上凡有比较重要的古病理学学术会议,彭隆祥都想方设法参加,推介中国西汉古尸研究的丰硕成果
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학술편력의 과정은 필자의 지난 연구 행로와도 매우 닮아 있어
아마도 팽 선생이 필자의 연배에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조선시대 미라 연구를 백프로 진행했을 것이라 보고,
필자 역시 마왕퇴 시대에 중국에 있었다면 그 연구에 깊이 관심을 가졌을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필자가 선생처럼 용감하게 좌우 안 가리고 마왕퇴 미라 연구에 뛰어 들었을지 장담하기는 쉽지 않다.
[마왕퇴와 그 이웃-21] 팽륭상彭隆祥 (1)
[마왕퇴와 그 이웃-21] 팽륭상彭隆祥 (1)
필자가 지금까지 마왕퇴 발굴 과정 중 중국은 문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기 때문에그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이야기들, 주로 난장판에 대해서만 적어보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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