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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부여문사(夫餘文思)

by taeshik.kim 2018.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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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마지막 의자왕 손자이면서, 태자 부여효의 아들이다. 나당연합군 침입에 사비성이 함락 위기에 처하고, 왕과 태자 효가 웅진으로 달아나고, 의자왕 다른 아들인 태가 마음대로 왕이 되어 성을 지키자, 이에 반발해 성문을 타고 내려가 당군에 항복했다. 


삼국사기 권 제28(백제본기 제6) 의자왕 : 20년(660)…6월에…당나라 군사가 승세를 타고 성으로 육박하자 왕은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하며 “성충(成忠)의 말을 쓰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을 후회한다.” 고 말하고는 드디어 태자 효(孝)와 함께 북쪽 변경으로 달아났다. 정방이 [사비]성을 포위하니 왕의 둘째 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무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왕자 융(隆)에게 말하였다. “왕과 태자가 [성을] 나갔는데 숙부가 멋대로 왕이 되었습니다. 만일 당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가면 우리들은 어찌 안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드디어 측근들을 거느리고 밧줄에 매달려 [성밖으로] 나갔다. 백성들이 모두 그들을 따라 가니 태(泰)가 말릴 수 없었다. 정방이 군사로 하여금 성첩(城堞)에 뛰어 올라가 당나라 깃발을 세우게 하였다.태는 형세가 어렵고 급박하여 문을 열고 명령대로 따를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왕과 태자 효가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 1 태종무열왕 : 이때 백제에서는 군사를 다 내어 막았지만 패해서 죽은 자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이리하여 당나라 군사는 이긴 기세(氣勢)를 타고서 성으로 들이닥쳤다. 의자왕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 탄식했다. "내가 성충의 말을 듣지 않고 있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의자왕이 드디어 태자 륭(隆. 효<孝>라고도 하지만 잘못이다)과 함께 북비(北鄙)로 도망했다. 정방이 그 성을 포위하자 왕의 둘째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무리를 거느리고 성을 굳게 지켰다. 이때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태(泰)에게 말했다. "왕이 태자와 함께 성에서 나가 달아났는데 숙부(叔父)가 맘대로 왕이 되었으니, 만일 당나라 군사가 포위한 것을 풀고 물러간다면 그때에는 우리들이 어떻게 온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는 좌우 사람들을 거느리고 성을 넘어 나아가자 백성들은 모두 그를 따르니 태(泰)는 이것을 말릴 수가 없었다. 소정방이 군사를 시켜 성첩(城堞)을 세우고 당나라 깃발을 꽂으니 태(泰)는 일이 매우 급해서 문을 열고 항복하기를 청했다. 이에 왕과 태자 륭(隆), 왕자 태(泰), 대신 정복(貞福)과 여러 성이 모두 항복했다. 소정방은 왕 의자와 태자 륭, 왕자 태, 왕자 연(演) 및 대신·장사(將士) 88명과 백성 1만 2,807명을 당나라 서울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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