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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한국인명지명사전

석탈해(昔脫解)


삼국사기 권제1(신라본기 제1) 남해차차웅 : 5년(서기 8) 봄 정월에 왕이 탈해(脫解)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맏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7년(서기 10) 가을 7월에 탈해를 대보(大輔)로 삼아 군무(軍務)와 국정(國政)을 맡겼다.

삼국사기 권제1(신라본기 제1) 유리니사금 : 유리 이사금(儒理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 남해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운제부인이고 왕비는 일지(日知) 갈문왕(葛文王)의 딸이다.<혹은 왕비의 성은 박씨이고 허루왕(許婁王)의 딸이라고도 한다>, 앞서 남해가 죽자 유리가 마땅히 왕위에 올라야 했는데, 대보(大輔)인 탈해가 본래 덕망이 있었던 까닭에 왕위를 미루어 사양하였다. 탈해가 말하였다.임금의 자리는 용렬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내가 듣건대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齒]가 많다고 하니 떡을 깨물어서 시험해보자. 유리의 잇금[齒理]이 많았으므로 이에 좌우의 신하와 더불어 그를 받들어 세우고 이사금(尼師今)이라 불렀다. 옛부터 전해져오는 것이 이와 같다. 김대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이사금은 방언으로 잇금을 일컫는 말이다. 옛날에 남해(南解)가 장차 죽을 즈음에 아들 유리(儒理)와 사위 탈해(脫解)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에 너희 박(朴), 석(昔) 두 성(姓)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어라.'고 하였다. 그 후에 김씨 성이 또한 일어나 3성(三姓)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서로 왕위를 이었던 까닭에 이사금이라 불렀다. 34년(서기 57) 가을 9월에 왕이 병환이 들자 신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탈해는 그 신분이 임금의 친척이고 지위가 재상의 자리에 있으며 여러 번 공명(功名)을 드러내었다. 짐(朕)의 두 아들은 재주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내가 죽은 후에 그로 하여금 왕위에 오르게 할 것이니, 나의 유훈을 잊지 말라!겨울 10월에 왕이 죽어 사릉원(蛇陵園) 안에 장사지냈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 1 제2대 남해왕(南解王) : 처음에 남해왕(南解王)이 죽자 그 아들 노례(弩禮)가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물려 주려 했다. 이에 탈해(脫解)가 말하기를, "나는 들으니 성스럽고 지혜 있는 사람은 이가 많다고 한다"하고 떡을 입으로 물어 시험해 보았다. 고전(古典)에는 이와 같이 전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임금을 마립간(麻立干)이라고도 했다. 이것을 김대문(金大問)은 해석하기를, "마립간(麻立干)이란 서열을 뜻하는 방언(方言)이다. 서열(序列)은 위(位)를 따라 정하기 때문에 임금의 서열은 주(主)가 되고 신하의 서열은 아래에 위치한다.  그래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라고 했다. 사론(史論)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왕(新羅王)으로서 거서간(居西干)과 차차웅(次次雄)이란 이름을 쓴 이가 각기 하나요, 이사금(尼師金)이라고 한 이가 열 여섯이며, 마립간(麻立干)이라 한 이가 넷이다. 신라말 명유(名儒) 최치원(崔致遠)이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을 지을 적에는 모두 모왕(某王)이라고만 하고 거서간(居西干) 등이라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혹시 그 말이 야비해서 부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서인가.  그러나 지금 신라의 일을 기록하는 데 방언(方言)을 모두 그대로 두는 것도 또한 마땅한 일일 것이다." 신라 사람들은 추봉(追封)된 이들을 갈문왕(葛文王)이라고 불렀는데, 이 일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삼국사기 권 제44(열전 제4) 거도  열전 : 거도(居道)는 그의 가계와 성씨가 전하지 않아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탈해니사금 때 벼슬해 간(干)이 되었다. 그때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이 국경 이웃에 끼어 있어 자못 나라의 걱정거리가 되었는데, 거도가 변경 지방관이 되어 그 곳을 병합하고자 했다. 매년 한 번씩 여러 말을 장토(張吐) 들판에 모아놓고 군사들에게 말을 타고 달리면서 놀이를 하게끔 했다. 당시 사람들이 이 놀이를 ‘마기(馬技)’라 불렀다. 두 나라 사람들이 (이 장면을) 자주 보아 왔으므로 신라의 평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하고는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에 병마를 출동해 불의에 쳐들어가 두 나라를 멸했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 1 제3대 노례왕(弩禮王) : 박노례이질금(朴弩禮尼叱今.유례왕儒禮王이라고도 함)이 처음에 매부(妹夫)인 탈해(脫解)에게 왕위(王位)를 물려주려 하자 탈해가 말했다.  "대개 덕이 있는 사람은 이[齒]가 많은 법이오.  그러니 잇금을 가지고 시험해 봅시다."  이리하여 떡을 물어 시험해 보니 왕의 이가 많았기 때문에 먼저 왕위에 올랐다.  이런 일로 인하여 왕은 잇금[尼叱今]이라고 한 것이다.  이질금(尼叱今)이란 칭호는 이 왕 때부터 시작했다.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1 탈해니사금 원년 : 탈해니사금(脫解尼師今)<[탈해를] 또는 토해(吐解)라고도 하였다.>이 왕위에 올랐다. 그때 나이는 62세였다. 성은 석(昔)씨이고 왕비는 아효부인(阿孝夫人)이었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는데, 그 나라는 왜국(倭國)의 동북쪽 1천 리 되는 곳에 있다. 앞서 그 나라 왕이 여국왕(女國王)의 딸을 맞아들여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이 되어 큰 알을 낳았다. 그 왕이 말하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은 것은 상서롭지 못하니 마땅히 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 여자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을 싸서 보물과 함께 궤짝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 가는 대로 가게 맡겨두었다. 처음에 금관국(金官國)의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금관국 사람들이 그것을 괴이하게 여겨서 거두지 않았다. 다시 진한의 아진포(阿珍浦) 어구에 다다랐다. 이때는 시조 혁거세가 왕위에 오른지 39년 되는 해이다. 그때 바닷가에 있던 할멈이 줄로 끌어 당겨서 해안에 매어놓고 궤짝을 열어 보니 작은 아기가 하나 있어 그 할멈이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자 신장이 아홉 자나 되고 풍채가 빼어나고 환했으며 지식이 남보다 뛰어났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이 아이의 성씨를 모르니, 처음에 궤짝이 왔을 때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울면서 그것을 따랐으므로 마땅히 작(鵲)에서 [조(鳥)를] 생략하여 석(昔)으로써 성을 삼고, 또 궤짝에 넣어둔 것을 열고 나왔으므로 마땅히 탈해(脫解)라 해야 한다.탈해는 처음에 고기잡이를 업(業)으로 하여 그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한 번도 게으른 기색이 없었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골상(骨相)이 특이하니 마땅히 학문을 하여 공명을 세워라."고 하였다. 이에 오로지 학문에만 힘써지리(地理)까지도 겸하여 알았다. 양산 아래 호공(瓠公)의 집을 바라보고는 길지(吉地)라고 여겨 속임수를 써서 그곳을 빼앗아 살았는데, 그 땅은 후에 월성(月城)이 되었다. 남해왕 5년에 이르러 [왕이] 그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고, 7년에는 등용하여 대보(大輔)로 삼아 정치의 일을 맡겼다. 유리왕이 장차 죽을 즈음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선왕(先王)이 유언으로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에는 아들이나 사위를 논하지 말고 나이가 많고 또한 어진 사람으로 왕위를 잇게 하라!'고 하셨으므로 내가 먼저 왕위에 올랐다. 이제 마땅히 왕위를 [그에게] 물려주어야겠다.  2년(서기 58) 봄 정월에 호공을 대보(大輔)로 삼았다. 2월에 몸소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3년(서기 59) 봄 3월에 왕이 토함산에 올라갔는데, 검은 구름이 덮개[蓋]처럼 하여 왕의 머리 위에 떠서 오래 있다가 흩어졌다. 여름 5월에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사신을 교환하였다. 6월에 살별이 천선(天船) [별자리]에 나타났다. 5년(서기 61) 가을 8월에 마한의 장군 맹소(孟召)가 복암성(覆巖城)을 들어 항복해 왔다. 7년(서기 63) 겨울 10월에 백제 왕이 땅을 넓혀 낭자곡성(娘子谷城)에 이르러, 사자를 보내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가지 않았다. 8년(서기 64) 가을 8월에 백제가 군사를 보내 와산성(蛙山城)을 공격하였다. 겨울 10월에 또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하였으므로 왕이 기병 2천 명을 보내 쳐서 쫓아보냈다. 12월에 지진이 일어났고 눈이 내리지 않았다.  9년(서기 65) 봄 3월에 왕이 밤에 금성 서쪽의 시림(始林)의 숲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새기를 기다려 호공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더니, 금빛이 나는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서 아뢰자,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와 열어 보았더니 조그만 사내아기가 그 속에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기이하고 컸다. 왕이 기뻐하며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귀한 아들을 준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는 거두어서 길렀다. 성장하자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이에 알지(閼智)라 이름하고 금궤짝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金)라 하였으며, 시림을 바꾸어 계림(鷄林)이라 이름하고 그것을 나라이름으로 삼았다. 10년(서기 66) 백제가 와산성을 공격하여 빼앗아 200명을 머물러 두고 지키게 했으나, [신라가] 곧 그것을 빼앗았다. 11년(서기 67) 봄 정월에 박씨의 귀척(貴戚)으로써 나라 안의 주ㆍ군(州郡)을 나누어 다스리게 했는데, 이름을 주주(州主)ㆍ군주(郡主)라 하였다. 2월에 순정(順貞)을 이벌찬으로 삼아 정치의 일을 맡겼다. 14년(서기 70) 백제가 침입해 왔다.17년(서기 73) 왜인이 목출도(木出島)에 침입하였다. 왕이 각간(角干) 우오(羽烏)를 보내 그들을 방어하게 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우오는 전사하였다. 18년(서기 74) 가을 8월에 백제가 변경을 노략질하였으므로 군사를 보내 그들을 막았다. 19년(서기 75) 크게 가물어 백성이 굶주렸으므로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어서 진휼하였다. 겨울 10월에 백제가 서쪽 변경 와산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20년(서기 76) 가을 9월에 군사를 보내 백제를 정벌하여 와산성을 다시 빼앗고, 백제로부터 와서 살던 사람 2백여 명을 모두 죽였다. 21년(서기 77) 가을 8월에 아찬 길문(吉門)이 가야(加耶) 군사와 황산진(黃山津) 어구에서 싸워 1천여 명을 목베었으므로 길문을 파진찬으로 삼아 공로를 포상하였다.23년(서기 79) 봄 2월에 살별[彗星]이 동쪽에 나타났고, 또 북쪽에도 나타났다가 20일만에 없어졌다. 24년(서기 80) 여름 4월에 서울에 큰 바람이 불었고, 금성의 동쪽 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가을 8월에 왕이 죽어 성 북쪽의 양정구(壤井丘)에 장사지냈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 1 신라시조(新羅始祖) 혁거세왕(赫居世王) : 두 성인(聖人)은 13세가 되자 오봉(五鳳) 원년(元年) 갑자(甲子.전 57)에, 남자는 왕이 되어 이내 그 여자로 왕후(王后)를 삼았다.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 지금 풍속에 경京을 서벌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이라 하고, 혹은 사라(斯羅)ㆍ사로(斯盧)라고도 했다.  처음에 왕이 계정(鷄井)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혹 나라 이름을 계림국(鷄林國)이라고도 했다.  이것은 계룡(鷄龍)이 상서(祥瑞)를 나타냈기 때문이다.  일설(一說)에는 탈해왕(脫解王) 때 김알지(金閼智)를 얻는데 닭이 숲속에서 울었다 해서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이라 했다고도 한다. 후세에 와서 드디어 신라(新羅)라는 국호로 정했던 것이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4대 탈해(脫解.토해<吐解>라고도 한다) 니질금(尼叱今)은 석씨(昔氏)다. 아버지는 완하국(琓夏國) 함달파왕(含達婆王)인데 화하국왕(花夏國王)이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적녀국왕(積女國王)의 딸이다. 비는 남해왕(南解王) 딸인 아로부인(阿老夫人)이다. 정사년(57)에 즉위해 23년 동안 다스렸다. 왕이 돌아가자 수장(水藏)하니, 미소(未召) 소정구(=井丘) 속이다. 뼈를 빚어 동악(東岳)에 안치하니 지금의 동악대왕(東岳大王)이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 1 제4대 탈해왕(脫解王) : 탈해치질금(脫解齒叱今.토해니사금吐解尼師今이라고도 한다)은 남해왕(南解王) 때(고본古本에는 임인壬寅년이라고 했으나 이것은 잘못이다.  가까운 일이라면 노례왕弩禮王 즉위 초년보다 뒤의 일일 것이니 양위讓位를 다투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또 먼저 일이라면 혁거세왕赫居世王 때의 일일 것이다.  그러니 이 일은 임인壬寅년이 아닌 것임을 알겠다)에 가락국(駕洛國) 바다 가운데에 배 한 척이 와서 닿았다.  이것을 보고 그 나라 수로왕(首露王)이 백성들과 함께 북을 치고 법석이면서 그들을 맞아 머물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배는 나는 듯이 계림(鷄林)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의 아진포(阿珍浦)로 달아났다(지금도 상서지촌上西知村ㆍ하서지촌下西知村의 이름이 있다).  이때 마침 포구에 한 늙은 할멈이 있어 이름을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고 하였는데 이가 바로 혁거세왕(赫居世王)의 고기잡이 할멈이었다. 그는 이 배를 바라보고 말했다.  "이 바다 가운데에는 본래 바위가 없는데 무슨 까닭으로 까치들이 모여들어서 우는가."배를 끌어당겨 찾아 보니 까치들이 배 위에 모여들었다.  그 배 안에는 궤 하나가 있었다.  길이는 20척(尺)이오.  너비는 13척이나 된다.  그 배를 끌어다가 나무 숲 밑에 매어 두었다.  그러나 이것이 흉(凶)한 것인지 길(吉)한 것인지 몰라서 하늘을 향해 고했다. 이윽고 궤를 열어 보니 단정히 생긴 사내아이가 하나 있고 아울러 칠보(七寶)의 노비(奴婢)가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을 7일 동안 잘 대접했더니 사내아이는 그제야 말을 했다.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이오(정명국正明國 혹은 완하국琓夏國이라고도 한다.  완하琓夏는 또 화하국花厦國이라고도 하니, 용성龍城은 왜국倭國 동북쪽 1천리 떨어진 곳에 있다).  우리 나라에는 원래 28 용왕(龍王)이 있어서 그들은 모두 사람의 태(胎)에서 났으며 나이 5, 6세부터 왕위(王位)에 올라 만민(萬民)을 가르쳐 성명(性命)을 바르게 했소.  팔품(八品)의 성골(姓骨)이 있는데 그들은 고르는 일이 없이 모두 왕위에 올랐소. 그때 부왕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積女國)의 왕녀(王女)를 맞아 왕비(王妃)로 삼았소.  오래 되어도 아들이 없자 기도를 드려 아들 낳기를 구하여 7년 만에 커다란 알[卵] 한 개를 낳았소.  이에 대왕은 모든 신하들을 모아 묻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았으니 고금(古今)에 없는 일이다. 이것은 아마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하고, 궤를 만들어 나를 그 속에 넣고 칠보와 노비들을 함께 배 안에 실은 뒤 바다에 띄우면서 빌기를, '아무쪼록 인연 있는 곳에 닿아 나라를 세우고 한 길을 이루도록 해 주시오'했소.  빌기를 마치자 갑자기 붉은 용이 나타나더니 배를 호위해서 지금 여기에 도착한 것이오."말을 끝내자 그 아이는 지팡이를 끌고 두 종을 데리고 토함산(吐含山) 위에 올라가더니 돌집을 지어 7일 동안을 머무르면서 성(城)안에 살 만한 곳이 있는가 바라보았다.  산봉우리 하나가 마치 초사흘달 모양으로 보이는데 오래 살 만한 곳 같았다.  이내 그곳을 찾아가니 바로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아이는 이에 속임수를 썼다.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 곁에 묻어 놓고, 이튿날 아침에 문 앞에 가서 말했다.  "이 집은 우리 조상들이 살던 집이오."  호공은 그렇지 않다 하여 서로 다투었다.  시비(是非)가 판결되지 않으므로 이들은 관청에 고발하였다.  관청에서 묻기를, "무엇으로 네 집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느냐"하자, 어린이는 말했다.  "우리 조상은 본래 대장장이었소.  잠시 이웃 고을에 간 동안에 다른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는 터요.  그러니 그 집 땅을 파서 조사해 보면 알 수가 있을 것이오."  이 말에 따라 땅을 파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다.  이리하여 그 집을 빼앗아 살게 되었다. 이 때 남해왕(南解王)은 그 어린이, 즉 탈해(脫解)가 지혜가 있는 사람임을 알고 맏 공주(公主)로 그의 아내를 삼게 하니 이가 아니부인(阿尼夫人)이다. 어느 날 토해(吐解)는 동악(東岳)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백의(白衣)를 시켜 물을 떠 오게 했다.  백의(白衣)는 물을 떠 가지고 오다가 중로에서 먼저 마시고는 탈해에게 드리려 했다.  그러나 물그릇 한 쪽이 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가 꾸짖자 백의는 맹세하였다.  "이 뒤로는 가까운 곳이거나 먼 곳이거나 감히 먼저 마시지 않겠습니다."  그제야 물그릇이 입에서 떨어졌다.  이로부터 백의는 두려워하고 복종하여 감히 속이지 못했다. 지금 동악(東岳) 속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세상에서 요내정(遙乃井)이라고 부르는 우물이 바로 이것이다. 노례왕(弩禮王)이 죽자 광호제(光虎帝) 중원(中元) 6년 정사(丁巳; 57) 6월에 탈해(脫解)는 왕위에 올랐다.  옛날에 남의 집을 내 집이라 하여 빼앗았다 해서 석씨(昔氏)라고 했다.  혹 또 까치로 해서 궤를 열게 되었기 때문에 까치[鵲]라는 글자에서 조자(鳥字)를 떼고 석씨(昔氏)로 성(姓)을 삼았다고도 한다.  또 궤를 열고 알을 벗기고 나왔다 해서 이름을 탈해(脫解)로 했다고 한다. 그는 재위(在位) 23년 만인 건초(建初) 4년 기묘(己卯; 29)에 죽어서 소천구(疏川丘) 속에 장사지냈다.  그런데 뒤에 신(神)이 명령하기를, "조심해서 내 뼈를 묻으라"고 했다. 그 두골(頭骨)의 둘레는 석 자 두 치, 신골(身骨)의 길이는 아홉 자 일곱 치나 된다.  이[齒]는 서로 엉기어 하나가 된 듯도 하고 뼈마디는 연결되어 있었다.  이것은 이른바 천하에 짝이 없는 역사(力士)의 골격(骨格)이었다.  이것을 부수고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 안에 모셔 두었다.  그랬더니 신(神)이 또 말하기를, "내 뼈를 동악(東岳)에 안치해 두어라"했다.  그래서 거기에 봉안케 했던 것이었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탈해脫解가 죽은 뒤 27世 문호왕文虎王 때 조로調露 2년 경진庚辰(680) 3월 15일 신유辛酉 밤 태종太宗의 꿈에, 몹시 사나운 모습을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였다.  "내가 탈해脫解이다.  내 뼈를 소천구疏川丘에서 파내다가 소상塑像을 만들어 토함산吐含山에 안치하도록 하라."  王은 그 말을 좇았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지금까지 제사를 끊이지 않고 지내니 이를 동악신東岳神이라고 한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 제1 김알지(金閼智) : 영평(永平) 3년 경신(庚申; 60, 중원中元 6년이라고도 하나 잘못이다.  중원中元은 모두 2년 뿐이다) 8월 4일에 호공(瓠公)이 밤에 월성(月城) 서리(西里)를 걸어가는데, 크고 밝은 빛이 시림(始林; 구림鳩林이라고도 함) 속에서 비치는 것이 보였다. 자줏빛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에 뻗쳤는데 그 구름 속에 황금(黃金)의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그 빛은 궤 속에서 나오고 있었다.  또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이 모양을 호공(瓠公)은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그 숲에 가서 궤를 열어보니 동남(童男)이 있는데 누웠다가 곧 일어났다.  이것은 마치 혁거세(赫居世)의 고사(故事)와도 같았으므로 그 말에 따라 그 아이를 알지(閼知)라고 이름지었다.  알지(閼知)란 곧 우리말로 소아(小兒)를 일컫는 것이다.  그 아이를 안고 대궐로 돌아오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르면서 기뻐하여 뛰놀고 춤을 춘다. 왕은 길일(吉日)을 가려 그를 태자(太子)로 책봉했다.  그는 뒤에 태자 자리를 파사왕(破娑王)에게 물려 주고 왕위(王位)에 오르지 않았다.  금궤(金櫃)에서 나왔다 하여 성(姓)을 김씨(金氏)라 했다.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1 파사니사금 :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 유리왕 둘째 아들이고 <혹은 유리왕 동생 나로(奈老)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왕비는 김씨 사성부인(史省夫人)이니 허루(許婁) 갈문왕(曷文王) 딸이다. 일찍이 탈해가 죽었을 때 신료들이 유리왕 태자인 일성(逸聖)을 왕위에 세우려고 하였으나,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일성은 비록 왕위를 이을 친아들이나 위엄과 현명함이 파사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하므로 마침내 파사를 임금으로 세웠다. 파사는 절약하고 검소한 생활로 씀씀이를 줄이고 백성을 사랑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삼국사기 권 제2(신라본기 제2)  미추니사금 : 미추니사금(味鄒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미추(味鄒)를 미조(味照)라고도 한다> 성은 김씨이다. 어머니는 박씨로 갈문왕 이칠(伊柒)의 딸이고, 왕비는 석씨 광명부인(光明夫人)으로 조분왕 딸이다. 그의 선조 알지(閼智)는 계림에서 났는데 탈해왕이 데려다가 궁중에서 키워 후에 대보(大輔)로 삼았다. 알지는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은 아도(阿道)를 낳았으며,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보(郁甫)를 낳았다. 그리고 욱보는 구도(仇道)를 낳았는데 구도는 곧 미추왕의 아버지이다. 첨해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미추를 왕으로 세웠다.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갖게 된 시초이다.

삼국사기 권제32 (잡지 제1) 악 : 회악(會樂)과 신열악(辛熱樂)은 유리왕 때 지었고, 돌아악(突阿樂)은 탈해왕 때 지었으며, 지아악(枝兒樂)은 파사왕 때 지었다. 사내악(思內樂)<사내(思內)는 시뇌(詩惱)라고도 한다>은 나해왕 때 지었고, 가무(舞)는 나밀왕(奈密王) 때 지었으며, 우식악(憂息樂)은 눌지왕 때 지었다.  대악(樂)은 자비왕 때 사람 백결선생(百結先生)이 지었으며, 우인(引)은 지대로왕(智大路王) 때 사람 천상욱개자(川上郁皆子)가 만들었다. 미지악(美知樂)은 법흥왕 때 지었고, 도령가(徒領歌)는 진흥왕 때 지었으며, 날현인(捺絃引)은 진평왕 때 사람인 담수(淡水)가 지었고, 사내기물악(思內奇物樂)은 원랑도(原郞徒)가 지었다. 내지(內知)는 일상군(日上郡) 음악이고, 백실(白實)은 압량군(押梁郡) 음악이며, 덕사내(德思內)는 하서군(河西郡) 음악이다. 석남사내(石南思內)는 도동벌군(道同伐郡) 음악이고, 사중(祀中)은 북외군(北郡) 음악이다.  이들은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쁘고 즐거운 까닭으로 지은 것이었다. 그러나 악기의 수효와 가무의 모습은 후세에 전하지 않는다. 다만 고기(古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 제2 가락국기(駕洛國記) : 즉위 2년 계묘(癸卯; 43) ... 그 궁궐(宮闕)과 옥사(屋舍)는 농사일에 바쁘지 않은 틈을 이용하니 그해 10월에 비로소 시작해서 갑진(甲辰; 44)년 2월에 완성되었다.  좋은 날을 가려서 새 궁으로 거동하여 모든 정사를 다스리고 여러 일도 부지런히 보살폈다. 이때 갑자기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夫人)이 아기를 배어 달이 차서 알을 낳으니, 그 알이 화해서 사람이 되어 이름을 탈해(脫解)라 했는데, 이 탈해가 바다를 좇아서 가락국에 왔다.  키가 3척이요 머리 둘레가 1척이나 되었다.  그는 기꺼이 대궐로 나가서 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하니 왕이 대답했다.  "하늘이 나를 명해서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려 함이니, 감히 하늘의 명(命)을 어겨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고, 또 우리 국민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탈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술법(術法)으로 겨뤄 보려는가?"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잠깐 동안에 탈해가 변해서 매가 되니 왕은 변해서 독수리가 되고, 또 탈해가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새매로 화하는데 그 변하는 것이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탈해가 본 모양으로 돌아오자 왕도 역시 전 모양이 되었다.  이에 탈해가 엎드려 항복한다.  "내가 술법을 겨루는 마당에 있어서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 잡히기를 면한 것은 대개 성인(聖人)께서 죽이기를 미워하는 어진 마음을 가진 때문입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툼은 실로 어려울 것입니다."  탈해는 문득 왕께 하직하고 나가서 이웃 교외의 나루터에 이르러 중국에서 온 배가 대는 수로(水路)로 해서 갔다.  왕은 그가 머물러 있으면서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水軍) 500척을 보내서 쫓게 하니 탈해가 계림(鷄林)의 땅 안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은 모두 돌아왔다.  그러나 여기에 실린 기사(記事)는 신라의 것과는 많이 다르다.

제왕운기 권下 新羅紀 : 계림에 느끼고 금궤에도 응하여/석씨.김씨 왕위를 이어받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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