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권 제26(백제본기 제4) 성왕 : 성왕(聖王)은 이름이 명농(明襛이고 무령왕 아들이다. 지혜와 식견이 빼어나고 일을 잘 결단했다. 무령이 죽자 왕위를 이었는데 국인들이 일컬어 성왕이라 했다.가을 8월에 고구려 군사가 패수(浿水)에 이르렀다. 왕이 좌장(左將) 지충(志忠)에게 명해 보병과 기병[步騎] 1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싸우게 해서 이를 물리쳤다.2년(524) 양(梁)나라 고조(高祖)가 조서를 내려 왕을 책봉하여 지절(持節) 도독백제제군사(都督百濟諸軍事) 수동장군(綏東將軍) 백제왕(百濟王)으로 삼았다. 3년(525) 봄 2월에 신라와 서로 사신을 교환하였다. 4년(526) 겨울 10월에 웅진성(熊津城)을 수리·수선하고 사정책(沙井柵)을 세웠다. 7년(529) 겨울 10월에 고구려 왕 흥안(興安)[안장왕]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와서 북쪽 변경의 혈성(穴城)을 함락하였다. [왕은] 좌평 연모(燕謨)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步騎] 3만 명을 거느리고 오곡(五谷)의 벌판에서 막아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는데,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 10년(531) 가을 7월 초하루 갑진에 별이 비오듯이 떨어졌다. 12년(534) 봄 3월에 사신을 양(梁)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4월 정묘에 형혹(熒惑)이 남두(南斗)를 침범하였다. 16년(538) 봄에 서울[都]을 사비(泗)<다른 이름은 소부리(所夫里)였다.>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하였다.18년(540) 가을 9월에 왕은 장군 연회(燕會)에게 명령하여 고구려의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19년(541)에 왕이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아울러 표를 올려 모시박사(毛詩博士)와 열반(涅槃) 등의 경의(經義) 및 공장(工匠)과 화사(畵師) 등을 청하였더니 [양나라에서] 이를 허락하였다. 25년(547) 봄 정월 초하루 기해에 일식이 있었다. 26년(548) 봄 정월에 고구려 왕 평성(平成)[양원왕]이 예(濊)와 모의하여 한강 북쪽[漢北]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였다. 왕은 사신을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 왕은 장군 주진(朱珍)에게 명령하여 갑옷 입은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였다. 주진이 밤낮으로 길을 가서 독산성 아래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와 한 번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27년(549) 봄 정월 경신에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은 양나라의 서울[京師]에 반란[寇賊]이 있었음을 알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이 이르러 성(城)과 대궐이 이미 황폐하고 허물어진 것을 보고 모두 단문(端門) 밖에서 소리내어 우니, 길을 가다가 보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후경(侯景)이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잡아 가두었는데, 후경의 난이 평정되어서야 바야흐로 환국할 수 있었다. 28년(550) 봄 정월에 왕은 장군 달기(達己)를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도살성(道薩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3월에 고구려 군사가 금현성(金峴城)을 포위하였다. 31년(553) 가을 7월에 신라가 동북쪽의 변경을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의 딸이 신라에 시집갔다.32년(554) 가을 7월에 왕은 신라를 습격하고자 하여 친히 보병과 기병[步騎]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伏兵)이 일어나자 더불어 싸웠으나 난병(亂兵)에게 해침을 당하여 죽었다. 시호(諡號)를 성(聖)이라 하였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26대 성왕(聖王)은 이름이 명농(明穠이다. 호녕왕(虎寧王) 아들이다. 계사년에 즉위해 31년을 다스렸다. 무오년에 도읍을 사비(泗泚로 옮겼고 (국호를) 남부여(南扶余)라고 일컬었다.
삼국사기 권 제37(잡지 제6) 지리 : 고전기(古典記)를 살펴보니, 동명왕(東明王) 셋째아들 온조(溫祚)가 전한(前漢) 홍가(鴻嘉) 3년 계묘(서기전 18)에 졸본부여(卒本扶餘)로부터 위례성(慰禮城)에 이르러 도읍을 세워 왕을 일컫고 389년을 지냈다. 13세 근초고왕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빼앗아 한성(漢城)에 도읍하고 105년을 지냈다. 22세 문주왕에 이르러 서울을 웅천(熊川)으로 옮기고 63년을 지냈다. 26세 성왕에 이르러 서울을 소부리(所夫里)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南扶餘)라고 하였으며, 31세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지낸 햇수가 122년이었다. 당나라 현경(顯慶) 5년 곧 의자왕 재위 20년(660)에 이르러, 신라의 유신(庾信)이 당나라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쳐서 이를 평정하였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2 남부여(南扶餘) 전백제(前百濟) 북부여(北扶餘) : 부여군(扶餘郡)은 전 백제(百濟) 도읍인데 소부리군(所夫里郡)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백제의 성왕(聖王) 26년 무오(戊午) 봄에 도읍을 사자(泗차)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했다" 하고, 주(注)에 "그 지명(地名)은 소부리(所夫里)이니 사자(泗차)는 지금의 고성진(古省津)이요 소부리는 부여의 딴 이름이다" 했다....<고전기(古典記)>에 의하면 이러하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아들 온조(溫祚)는 전한(前漢) 홍가(鴻佳) 3년 계유(癸酉)(묘卯; 前 18)에 졸본부여에서 위례성(慰禮城)으로 와서 도읍을 정하고 왕이라 일컬었다. 14년 병진(丙辰)에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겨 389년을 지냈으며, 13세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인 함안(咸安) 원년(元年; 371)에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빼앗아 도읍을 북한성(北漢城; 지금의 양주楊洲)으로 옮겨 105년을 지냈다. 22세 문주왕(文周王)이 즉위하던 원휘(元徽) 3년 을묘(乙卯; 475)에는 도읍을 웅천(熊川; 지금의 공주公州)으로 옮겨 63년을 지내고, 26세 성왕(聖王) 대에 도읍을 소부리(所夫里)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하여 31세 의자왕(義慈王)에 이르기까지 120년을 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27(백제본기 제5) 위덕왕 : 위덕왕(威德王)은 이름은 창(昌)이고 성왕의 맏아들이다. 성왕이 재위 32년에 죽자 왕위를 이었다.
삼국사기 권 제27(백제본기 제5) 혜왕 : 혜왕(惠王)은 이름이 계(季)이고 명왕(明王)의 둘째 아들이다. 창왕(昌王)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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