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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아신왕(阿莘王)

by taeshik.kim 2018.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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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 제25(백제본기 제3) 아신왕본기 즉위년 : 아신왕(阿莘王)<아방(阿芳)이라고도 한다>은 침류왕 맏아들이다. 처음 한성(漢城)의 별궁(別宮)에서 태어났을 때 신비로운 광채가 밤에 비치었다. 장성함에 뜻과 기개가 빼어났으며, 매 사냥과 말타기를 좋아했다. 왕이 죽었을 때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숙부 진사가 왕위를 이었는데 8년에 죽자 즉위하였다. 2년(393) 봄 정월에 동명묘(東明廟)에 배알했다. 또 남쪽 제단[南壇]에서 천지에 제사지냈다. 진무(眞武)를 좌장(左將)으로 삼고 군사 업무를 맡겼다. 무(武)는 왕의 외삼촌으로 침착하고 굳세며 큰 지략이 있어 당시 사람들이 복종했다. 가을 8월에 왕이 무(武)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관미성(關彌城)은 우리 북쪽 변경의 요해지(要害地)이다. 지금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는 과인(寡人)이 분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바이다. 경은 마땅히 마음을 써서 설욕하라.”드디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도모했다. 무가 몸소 사졸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면서 석현성(石峴城) 등 다섯 성을 회복하려고 먼저 관미성을 포위하였으나, 고구려 사람들은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무는 군량 수송이 이어지지 못하므로 이끌고 돌아왔다. 3년(394) 봄 2월에 맏아들 전지(腆支)를 태자로 삼고, 크게 사면했다. 서제(庶弟) 홍(洪)을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가을 7월에 고구려와 수곡성(水谷城) 밑에서 싸워 패했다. 금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4년(395) 봄 2월에 살별[星]이 서북쪽에 나타났다가 20일만에 없어졌다. 가을 8월에 왕이 좌장 진무(眞武) 등에게 명해 고구려를 치게 했다. 고구려 왕 담덕(談德)이 친히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패수(浿水) 가에 진을 치고 막아 싸우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해 죽은 자가 8천 명이었다. 겨울 11월에 왕이 패수 싸움을 보복하려 친히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 청목령(靑木嶺) 밑에서 머물렀으나 큰 눈을 만나 병사들이 많이 얼어죽자 군(軍)을 돌려 한산성(漢山城)에 이르러 군사들을 위로했다. 6년(397) 여름 5월에 왕이 왜국(倭國)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腆支)를 볼모로 보냈다. 가을 7월에 한수 남쪽에서 크게 사열했다. 7년(398) 봄 2월에 진무를 병관좌평으로 삼고, 사두(沙豆)를 좌장(左將)으로 삼았다. 3월에 쌍현성(雙峴城)을 쌓았다. 가을 8월에 왕이 장차 고구려를 치려 군사를 내서 한산 북쪽 목책에 이르렀다. 그 날 밤에 큰 별이 병영 안에 떨어져 소리가 났다. 왕이 이를 심히 꺼리어 곧 중지했다. 9월에 서울 사람들[都人]을 모아 서쪽 돈대[西臺]에서 활쏘기를 익히게 했다. 8년(399) 가을 8월에 왕이 고구려를 치고자 하여 군사와 말들을 크게 징발하였다. 백성들은 전역(戰役)에 시달려 신라로 많이 도망하니 호구가 줄었다. 9년(400) 봄 2월에 살별[星]이 규(奎)와 루(婁) [별자리]에 나타났다. 여름 6월 초하루 경진에 일식이 있었다. 11년(402) 여름에 크게 가물어 벼의 모가 타서 말랐다. 왕이 친히 횡악(橫岳)에서 제사지냈더니 곧 비가 왔다. 5월에 사신을 왜국에 보내 큰 구슬을 구하였다. 12년(403) 봄 2월에 왜국의 사신이 왔다. 왕이 이를 맞아 위로함이 특히 후하였다. 가을 7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쳤다. 14년(405) 봄 3월에 흰 기운이 왕궁 서쪽에서 일어났는데 마치 한 필의 비단[匹練]과 같았다. 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17대 아신왕(阿莘王)은 아방(阿芳)이라고도 한다. 진사(辰斯)의 아들이다. 임진년에 즉위해 13년을 다스렸다.


삼국유사 권3 흥법3 난타벽제(難陁闢濟) :  <백제본기(百濟本記)>에 이렇게 말했다. …또 아신왕(阿莘王)이 즉위한 대원(大元) 17년(392) 2월에 영을 내려 불법(佛法)을 숭상하고 믿어서 복(福)을 구하라고 했다. 마라난타(滅難陀)는 번역해서 동학(童學; 그의 이적異迹은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이라고 한다.


삼국사기 권 제25(백제본기 제3) 전지왕본기 즉위년 : 전지왕(腆支王)<직지(直支)라고도 한다>은 양서(梁書)에는 이름을 영(映)이라고 했다. 아신(阿莘)의 맏아들이다. 아신이 재위 제3년에 태자로 삼았고, 6년에 왜국에 볼모로 보냈다. 14년에 왕이 죽자 왕의 둘째 동생 훈해(訓解)가 정사를 대리하면서[攝政] 태자의 환국을 기다렸는데, 막내 동생 혈례(蝶禮)가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전지가 왜국에서 부음(訃音)을 듣고 소리내어 울며 귀국하기를 청하니 왜왕이 병사 100명으로써 호위해 보냈다. [전지가] 국경에 이르자 한성 사람 해충(解忠)이 와서 고하였다. “대왕이 죽자 왕의 동생 혈례가 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원컨대 태자는 경솔히 들어가지 마십시오.” 전지는 왜인(倭人)을 머물러 두어 자기를 호위하게 하고, 바다의 섬에 의거하여 기다렸더니, 나라 사람들이 혈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왕비는 팔수부인(八須夫人)이니 아들 구이신(久辛)을 낳았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18대 전지왕(腆支王)은 진지왕(眞支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이 영(映)이다. 아신(阿莘)의 아들이다. 을사년에 즉위해 15년을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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