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애국과 친일 사이, 메이지 유신의 경우

by 초야잠필 2024. 10. 21.
반응형

일제시대 말. 이전에 민족운동을 하던 많은 사람이 일본 편으로 돌아섰으니 이를 변절, 훼절이라 하여 우리는 비판하지만, 

사실 친일부역배가 되느냐 애국자가 되느냐는 많은 경우 외부 상황의 영향을 받는다.

일본- 

메이지유신 시대에 에도시대 삼백년간 막부가 먹을 것 줘, 권력 줘 

애지중지 키운 사무라이들이 집단으로 막부를 배신했다. 

물론 이는 미토학으로 대표되는 유교 근왕 이데올로기가 사무라이 계층을 파고 든 탓도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메이지유신과 이를 군사적으로 관철한 보신전쟁 시대에 막부편에 서야 했을 많은 사무라이가 오직 눈치만 보았고 

심지어는 막부를 쓰러뜨리는 쪽에 참여한 번도 많았다. 

막부편에서 의미있는 저항은 정말 드물어서 아이즈 번, 나가오카 번 등이 관심을 끌 만했고 

마지막에 북해도로 도망간 이들이 최후의 저항을 했지만 전체적으로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대부분의 사무라이들은 사태를 관망하거나 

싸우지도 않고 신정부군에 항복하거나 하였고, 최후의 전쟁에서 막부를 지키기 위해 설계한 이에야스의 꿈은 덧없이 끝나고 말았다. 

이들 대부분은 이렇게 무력하게 눈치를 보며 막부 입장에서는 배신자의 역할로 끝나버렸지만 

신정부 하에서 또 그 나라를 근대화로 이끌고 간 것도 바로 이들 메이지유신 하에서 무력해 마지 않았던 사람들로 

이들이 대부분 일본 근대화에 굵은 족적을 남겼다. 

독야청청 세상이 어떻게 바뀌던 자신의 신념을 지킬수 있다면야 당연히 우리가 그 성패를 별개로 존경해야 하겠지만, 

그런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에 그렇게 많지 않다는 뜻이다. 

일제시대 말, 국내에는 자신의 신념을 마지막까지 철두철미 지킨 그런 사람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는데, 

이건 뭐 특별할 것도 없고 일본의 메이지유신만 봐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우리나라가 망하지 않았거나, 망했더라도 40년대 태평양전쟁의 전황만 국내에서 어느 정도 정확히 알고 있었더라도, 

지금은 친일 낙인이 찍혀버린 많은 이들이 아마 자신의 인생행보를 달리 했으리라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아무튼 그들이 40년대에 변절할 때까지 쌓아온 업적을 생각하면 개인적으로나 한국민족의 입장에서나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강철 같은 신념을 이야기 하고 독립운동을 이야기 할 때, 우리 모두 겸허해야 하는 부분도 마땅히 있어야 하겠기에 써 본다. 


1860년 미국에서 현지 소녀와 사진을 찍은 후쿠자와 유키치.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이 자주적 근대화를 성공했기에 일본 근대화 사상의 거물로 남았지, 한국처럼 일본이 망했으면 일본판 친일파가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큰 사람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