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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영류왕(榮留王)

by taeshik.kim 2018.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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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제27대 왕.

삼국사기 권 제20(고구려본기 제8) 영류왕본기 : 영류왕(榮留王)은 이름이 건무(建武)<또는 성(成)이라고도 한다>이며, 영양왕의 배다른 동생이다. 영양왕이 재위 29년에 훙하므로 즉위했다. 2년(619) 봄 2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4월에 왕은 졸본에 행차하여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5월에 왕은 졸본으로부터 돌아왔다.4년(621) 가을 7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5년(622)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당나라 고조(高祖)가 수나라 말기에 전사들이 우리 나라에서 많이 사로잡힌 것을 유감으로 여기고 왕에게 조서를 내려 말했다. 『짐은 삼가 하늘의 명을 받들어 온 땅에 군림하여, 3령에 공손히 순종하고 모든 나라를 불러 쓰다듬으며, 넓은 하늘 아래를 골고루 어루만지고 사랑하여, 해와 달이 비치는 곳을 모두 평안케 하였다. 왕은 요동을 다스리며 세세토록 번복(藩服)에 머물면서, 정삭(正朔)을 받들고, 멀리서도 조공을 바치려고 사신을 보내 산천을 넘어 정성을 나타내었으니, 짐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이제 천지 사방이 평안하고 사해(四海)가 잘 다스려져서, 옥백(玉帛)이 통하고 도로가 막힘이 없으니, 바야흐로 화목함을 펴서 오랫동안 교분(交分)과 우의(友誼)를 두텁게 하고 각기 강토를 유지하면, 어찌 훌륭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다만 수나라 말년에 전쟁이 계속되고 난이 일어나, 싸우는 곳에서 각각 그 백성을 잃어, 마침내 골육이 헤어지고 가족이 나뉘고, 여러해 지나도록 홀어미와 홀아비의 원한을 풀어주지 못하였다. 지금 두 나라가 화통하여 의리에 막힘이 없게 되었으므로 이곳에 있는 고구려 사람들을 모아서 곧 보내려고 한다. 왕은 그곳에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놓아주어 편안히 기르는 방도를 힘써 다하고, 어질고 딱하게 여기는 도리를 함께 넓혀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중국사람을 모아서 보냈는데 수가 만여 명에 이르렀다. 고조가 크게 기뻐하였다. 6년(623) 겨울 12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7년(624) 봄 2월에 왕은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책력을 반포해 줄 것을 청하였다. [황제가] 형부상서 심숙안(沈叔安)을 보내 왕을 상주국(上柱國) 요동군공 고구려국왕으로 책봉하고, 도사(道士)에게 명하여 천존상(天尊像) 및 도법(道法)을 가지고 와서 노자(老子)를 강의하게 하였다. 왕과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들었다. 겨울 12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8년(625)에 왕은 사람을 당나라에 보내 불교와 도교의 교법을 배워오기를 구하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9년(626)에 신라와 백제가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고구려가 길을 막아 입조하지 못하게 하고 또 거듭 침략합니다.”라고 말하였다. 황제가 산기시랑 주자사(朱子奢)를 보내 절부를 가지고 화친을 권하게 하였다. 왕은 표를 올려 사죄하고 두 나라와 화평할 것을 청하였다.11년(628) 가을 9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태종(太宗)이 돌궐의 힐리극한(利可汗)을 사로잡은 것을 축하하고, 겸하여 봉역도(封域圖)를 바쳤다. 12년(629) 가을 8월에 신라 장군 김유신이 동쪽 변경으로 쳐들어 와서 낭비성(娘臂城)을 깨뜨렸다. 9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14년(631)에 당나라가 광주사마(廣州司馬) 장손사(長孫師)를 보내 수나라 전사들의 해골을 묻은 데에 와서 제사지내고, 당시 세운 경관(京觀)을 허물었다. 봄 2월에 왕이 많은 사람을 동원해 장성(長城)을 쌓으니, 동북쪽으로 부여성에서 동남쪽으로 바다에 이르러기까지 천여 리가 되었다. 총 16년만에 공사를 마쳤다. 21년(638) 겨울 10월에 신라 북쪽 변경 칠중성(七重城)을 침략했다. 신라 장군 알천(閼川)이 막으므로 칠중성 밖에서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졌다. 23년(640) 봄 2월에 세자 환권(桓權)을 당에 보내 조공했다. 태종이 위로하고 선물을 특별히 후하게 주었다. 왕은 자제를 당나라에 보내 국학(國學)에 입학할 것을 청했다. 가을 9월에 해가 빛이 없다가 3일이 지난 뒤 다시 밝아졌다. 24년(641)에 황제는 우리 태자가 입조하였으므로, 직방낭중(職方郎中) 진대덕(陳大德)을 보내 노고에 보답하였다. [진]대덕이 국경으로 들어와서 이르는 성읍마다 관리들에게 비단을 후하게 주면서 “내가 산수를 좋아하는데 이곳에 경치가 뛰어난 곳이 있으면 보고 싶다.”고 말하였다. 관리들은 기꺼이 그를 인도하여 놀러 돌아다니며 가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그 세세한 곳을 다 알게 되었다. 중국사람으로 수나라 말년에 군대에 나갔다가 숨어서 남게 된 사람들을 보면, 친척들의 생사를 말해주어 사람들마다 눈물을 흘렸다. 그리하여 가는 곳마다 남녀가 좌우에서 그를 보았으며 왕은 군대의 호위를 성대하게 하여 사신을 맞이하였다. [진]대덕이 사신으로 온 것을 기회로 나라의 허실을 엿보았으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다. [진]대덕이 돌아가 아뢰니 황제가 기뻐하였다. [진]대덕이 황제에게 “그 나라가 고창(高昌)이 망한 것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객사에서 접대하는 것이 평상시보다 더 은근합니다”고 말했다. 황제가 말했다. “고구려는 본래 사군(四郡)의 땅이다. 내가 군사 수만 명을 내어 요동을 공격하면 저들은 필시 나라의 모든 힘을 들여 구하려고 할 것이다. 따로 수군을 보내 동래(東萊)에서 출병하여 바닷길로 평양으로 가서 수군과 육군이 합세하면, 그 나라를 빼앗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산동의 주현(州縣)이 피폐하여 회복되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들을 괴롭히지 않으려 할 뿐이다”. 25년(642) 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했다. 왕은 서부(西部) 대인(大人)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명해 장성을 쌓는 일을 감독케 했다. 겨울 10월에 개소문이 왕을 죽였다. 11월에 태종은 왕이 죽은 것을 듣고, 동산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고 명을 내려 물건 300단(段)을 주고, 사신을 보내 절부를 가지고 조위케 했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27대 영류왕(榮留王)은 이름이 □□인데 건무(建武)라고도 한다. 무인년(618)에 즉위해 24년을 다스렸다. 

舊唐書卷一 本紀第一 高祖 : 七年(624) 春正月 己酉에 高麗王 高武를 봉하여 요동군왕(遼東郡王)으로 삼고, 百濟王 부여장(扶餘璋)을 대방군왕(帶方郡王), 新羅王 김진평(金眞平)을 낙랑군왕(樂浪郡王)으로 삼았다.(七年春正月己酉, 封高麗王高武爲遼東郡王, 百濟王扶餘璋爲帶方郡王, 新羅王金眞平爲樂浪郡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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