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기는 신라, 저장고는 백제"…유물 혼재된 옥천 이성산성
2020-12-07 11:10
*** 우선 첨부한 우리 공장 옥천발 기사 제목은 조금은 오해 소지도 없지는 않다. 아래 소개하는 이번 발굴성과를 토대로 이해해 주기 바란다. 신라 산성에서도 저와 같은 이른바 저장구덩이가 대량으로 출현한다.
저와 같은 양상은 한국고고학에서는 2000년 무렵인가 공주 장선리 유적에서 떼로 출현하면서, 그것을 최몽룡 선생이 삼국지 한전韓傳에서 말하는 토실土室과 연결하면서 나중에 이상하게 그 연구가 꼬이게 되는 발판을 마련했으니, 이 토실론은 이후 적지 않은 반론이 제기되었으니, 현재는 토실로 보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 것으로 안다.
1. 문헌에 등장하는 이성산성已城山城
옥천 이성산성은 옥천군 청성면 산계리 산20-1번지 일원에 소재하는 해발 115~155m 높이 구릉에 위치한 삼국시대 산성이다. 최근의 발굴성과와 문헌기록을 조합해 이곳이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8년(486) 봄 1월에 등장하는 다음 기사
이찬 실죽을 장군으로 삼고 일선 지역 장정 3천 명을 징발해 삼년과 굴산 두 성을 고쳐 쌓았다 拜伊湌實竹爲將軍. 徵一善界丁夫三千, 攺築三年·屈山二城. 이찬伊湌 실죽實竹을 배拜하여 장군將軍으로 삼고는 일선一善 경내 장정 3천 명을 징발하여 삼년三年·굴산屈山 두 성을 개축改築케 했다.
에 말하는 굴산성屈山城이라는 견해가 설득력 있게 제출 중인 것으로 안다.
내친 김에 굴산성, 혹은 그에 해당하는 산성에 관한 흔적들을 적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삼국사기 지리지에
삼년군三年郡은 본디 삼년산군三年山郡인데, 경덕왕景德王이 개명改名하니, 지금[삼국사기 편찬 당시]의 보령군保齡郡이다. 휘하에 거느린 현[영형領縣]은 둘이라, (개중 하나인) 청산현淸川縣은 본디 살매현薩買縣이라 경덕왕이 개명하니 지금도 그대로 쓴다. (다른 하나는) 기산현耆山縣이라 본디 굴현屈縣인데 경덕왕이 개명하니 지금의 청산현靑山縣이다.
세종실록지리지(1454) 청산현淸川縣 조를 보면
이성산석성已城山石城이 현 소재지 서쪽 6리 지점에 있으니, 둘레 337걸음이며, 험조險阻하며 그 안쪽에 우물 하나가 있어 겨울이라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한다. 군창軍倉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는
이성산성已城山城은 현 서쪽 8리 지점에 있다. 돌로 쌓았고 둘레 2천910尺에 높이 8尺이다. 안에 우물 하나가 있고 군창이 있다.
고 했다. 같은 승람 고적 조를 보면
저점고성猪岾古城이 현 서쪽 9리 지점에 있으니 석축石築으로 둘레 2천57척이요 그 안에는 우물 하나가 있다. 지금은 버려졌다.(** 지금 버려진 것은 성 전체를 말함인 듯하며, 우물은 아닌 듯하다.)
대동지지(1861~66) 청산현 고적 조에는
이성已城은 이성산已城山 위에 있는데 둘레 2천91척이다. 우물 하나가 있다.
고 했다. 아울러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1942) 옥천군 성지城址 항목을 보면
성 이름은 알 수 없다…작은 구릉 위에 있으며 토축 산성으로 서북쪽 부분은 2중으로 축조되었고 토루土壘는 겨우 솟아있을 뿐이다. 둘레는 약 600칸이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이르기를 「이성산성已上山城은 서쪽 8리에 있으며 석축石築이다. 안에 우물 하나가 있다」고 했으니 그에 상당하는 듯하다.
城名不詳…小丘上ニ在リ土築ノ山城ニシテ西北ノ部分ハ二重ニ築造セラル土壘ハ僅ユ隆起スルノミ周圍約六百間 文獻備考ニ「已上山城 在西八里石築內有井一」ト記スモノニ相當スルモノノ如シ
이 산성에 대해서는 두어 번 이곳 블로그에서도 다룬 적 있거니와, 그것은 이 글 마지막에 첨부하는 링크들을 참조하셨으면 한다.
산성이 들어선 구릉은 전체로 보아 반월형半月形, 곧 반달 모양에 가까운 평면 형태를 띠지만, 각 방향 능선이 상당한 굴곡을 이룬다. 이 구릉은 해발 155.0m 최고 봉우리에서 이어지는 동쪽 부분이 높고 서쪽으로 점차 낮아지는 동고서저東高西低 지형이다. 그 남서쪽으로 뻗은 작은 가지능선을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에는 계곡이 형성되어 있다.
2. 이전 조사 현황
이성산성 조사 현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정밀지표조사(중원문화재연구원, 2015년)
- 옥천 이성산성(기존 이름 옥천 산계리토성)의 현황 파악[성벽 둘레 1,140m / 면적 59,160㎡]
- 관련 문헌기록, 연혁 정리 및 주변 유적(옥천 저점산성, 산계리 고분군 등) 현상 파악
- 정비보존 기본계획 수립
○ 긴급 발굴조사(국강고고학연구소, 2015년)
- 산성 서벽 중앙부 훼손이 심한 25m 구간 발굴조사(조사면적 800㎡)
- 선축先築 토축 성벽 외측에 석축을 후대에 부가한 양상 확인
- 토성 초축 시기는 중심토루 출토 고배편 등을 통해 5세기대로 파악
- 내벽 석축과 등성 시설이 조성되면서 매몰한 수혈유구에서 단각고배, 인화문 토기편 등이 출토되어 수개축이 이루어진 시기는 7세기대로 판단
3. 2020년 본 조사 이전 사전 조치
○ 이성산성 2차 시굴조사(도지정문화재 보수정비사업)
- 문화재 현상변경허가(충청북도 2020. 3. 20.) - 충청북도문화재위원회 부동산분과 제1차 회의
- 현상변경허가 알림(2020. 3. 26.) - 충청북도청 문화예술산업과-5740호
- 문화재청 매장문화재 발굴 허가(2020. 6. 3.) - 허가 제2020-0794호
- 현장조사기간 : 2020. 6. 8.∼2020. 6. 18.(실조사일수 9일, 조사면적 15,516㎡)
- 시굴조사 결과, 성내 서쪽 평탄지와 남벽 인근 상부 평탄지를 중심으로 집수시설(추정 목곽고) 1기, 집수시설 관련 방형수혈 12기, 주공 14기를 비롯하여 삼국시대 주거지 5기, 조선시대 건물지 1동, 수혈 13기, 원형수혈 21기 등 총 67기의 유구가 확인됨.
○ 이성산성 2차 정밀발굴조사 : 문화재청 매장문화재 발굴 변경허가(2020. 6. 23.) - 허가 제2020-0794호
이런 사전 조사들을 통해 드러난 양상들을 좀 더 상세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성산성은 이러한 구릉 정상부 능선이라는 자연지형을 따라 성벽을 만들었으니, 전체 둘레 1,140m에 내부 면적은 약 59,160㎡다. 성벽은 현재 대부분 구간에서 그 흔적만 확인된다. 외측 성벽은 25~45° 안팎의 경사면을 이루어 구릉 외측 자연 경사면과 뚜렷하게 구분하기는 어렵다. 특히 북쪽 성벽과 서쪽 성벽은 훼손이 극심하다.
서쪽 성벽 훼손부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뤄져 성벽 구조가 드러났으니, 초축 당시 성벽은 판축으로 조성한 토축 성벽[土壘]이었으며 이후에 덧댄 석축 성벽은 후대에 개축하면서 등장한 것으로, 토루 바깥면을 수직에 가깝게 깎아낸 다음 장방형으로 깨서 만든 돌들을 1겹으로 쌓아 올렸다. 외벽 석축부 축조 양상을 볼 적에 5세기 후반~6세기대 무렵 신라 석축산성에서 확인되는 그런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게 바깥에 덧댄 석축 성벽은 전체 성벽에 걸쳐 고른 양상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단절 현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전체 구간에 걸친 개축이 있었는지 아닌지는 불명이다.
서쪽 성벽 안쪽에서 석축시설과 등성시설, 수혈유구 등이 함께 확인됐다. 이 중 단면 플라스크형 수혈유구(지름 60~190㎝, 깊이 276㎝)는 개축한 성벽 안쪽 토루와 석축시설 아래층에서 드러남으로써 이들 개축 성벽보다는 앞선 시기에 이미 들어선 것으로 파악된다.
수혈유구는 판축한 중심 토루 안쪽 나무기둥렬 연결선에서 성 안쪽으로 약 1.5m 떨어진 지점에 있다. 그 안쪽에서는 성벽을 고치는 과정에서 섞여 흙더미가 확인된다. 그런 흙더미에서 완과 단경호 및 단각고배 대각편, 원점문과 수적형문을 시문한 고배 구연부편 등이 나왔다.
판축이 확인되는 성벽 중심 토루를 만는 시기는 그에서 출토하는 고배편 등의 토기로 보아 5세기 무렵으로 여겨지며, 이후 개축은 6세기말~7세기경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4. 2020년 발굴조사가 폭로한 이성산성
발굴조사는 옥천군 의뢰로 한국선사문화연구원이 수행했다. 아래는 이 연구원 조사성과를 요약한 것이다.
a. 조사지점
조사대상지는 산성 서쪽과 남쪽 성벽 안쪽으로 이어지는 완경만 경사지대와 평탄대지에 실시한 시굴조사 결과 인간 활동 흔적이 드러난 일부 구간이다. 서문이 있던 곳으로 추정하는 지점에서 성 안쪽 중앙 계곡에 개설한 통행로를 따라 동쪽으로 약 100m 정도 들어간 구간의 북쪽과 남쪽 지역에 해당한다. 경사지대는 계단상 경작지와 묘역 등이 조성되면서 본래 지형이 상당 부분 훼손됐다. 근대 지형도 등을 통해 보면 추정 서문터 북서쪽 평탄대지에는 근현대 가옥이 있었다.
b. 조사결과
대상지역을 전면 제토한 결과 남쪽 성벽 안쪽 지역에서 원형수혈竪穴 60기, 조선시대 주거지 1기, 주공柱孔 80여기, 석렬石列 흔적 1곳 등이 드러났고, 서쪽 성벽 안쪽에서는 평면 방형 목곽고木槨庫 1기와 4.2~4.4m 간격으로 평행하게 진행하는 목주열木柱列 2열(개별 주혈注穴 30기), 석렬 1기 등이 확인됐다.
남쪽 성벽 지점을 일부 트렌치 조사한 결과 기반암을 성 바깥으로 계단을 이루도록 정지한 후 사질토와 점질토를 층층이 쌓아 올린 층위가 확인되었다. 표토 아래 약 2.0m 깊이에서 기반암이 확인되었고 이로부터 약 1.1m 높이까지는 성 외측 방향으로 약간 낮아지는 층위를 이루는데 반해, 그 위로는 수평에 가까운 층위가 조성되었다.
성 내측 계단상 기반암과 닿는 부분에는 30×42㎝~34×53㎝ 정도 크기로 비교적 큰 깬돌을 1열로 놓았다. 현재 2단 석렬이 확인된 상태로 정교하지는 않지만 성 내외측 방향을 향해 면을 맞추었으며 석렬 간 폭은 90~95㎝ 내외. 이 부분은 성벽 내측을 보강하면서 동시에 성내 공간을 활용하기 위한 대지조성층으로 파악된다. 기반암 계단상 정지가 시작되는 부분에서는 직경 약 20~30㎝ 주공이 1~2m 간격을 이루며 확인되었다.
유물포함층에서는 여러 기종 유물이 수습되는데 특히 완류 비중이 높다. 이 부분에서는 원형수혈(59, 60호)이 성벽조성층과 유물포함층을 파고 들어간 양상이 뚜렷하게 확인된다.
현재까지 56곳이 드러난 원형수혈은 대체로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단면 플라스크형. 상부 직경을 기준으로 크게 150~180㎝ 내외 규모와 220㎝ 이상 규모로 대별한다. 평면 배치에서는 규모에 따른 구분이 확인되지 않고 혼재한다.
내부에서는 전반적으로 층위상 유구의 사용과는 직접 연결하기 어려운 폐기(사용 중단) 후 퇴적으로 이해되는 내부토에서 유물이 출토되는 양상이다. 다만, 남벽 내측 북서쪽에 치우친 33호 원형수혈에서는 다수 완을 비롯해 호, 단각고배 등이 주로 바닥면 가장자리를 따라 드러났다. 수혈 내부에 특별한 시설은 확인되지 않는 편이지만 26호는 남쪽 부분에 석재를 쌓아 단상의 시설을 조성한 예가 드러난다.
해발 약 123.5m에서 120m까지 북서쪽으로 저평하게 이어지는 평탄면 서쪽 성벽 안쪽구간에서 드러난 흔적 중에는 목곽고가 주목할 만하다. 상당 부분 훼손됐다.
조사 결과 먼저 기반암을 방형으로 굴착하여 방형 수혈을 조성한 후, 그 안쪽에 치목한 목재를 가구하여 방형 목곽을 완성한 것으로 파악된다. 기반암을 굴착한 수혈 크기는 남북 장축 565㎝, 동서 단축 535㎝ 규모다. 목곽은 남북 장축 4m, 동서 단축 3.5m 정도로 추정된다. 목곽과 수혈 사이 공간은 회색 점질토를 80~120㎝ 두께로 채웠다.
두께 약 15㎝ 이상 방형 각재를 포함한 목재가 다량 노출되는 점으로 보아 목곽 상부구조를 이룬 들보梁木 등이 존재했을 것으로 판단한다.
추정 목곽고 서쪽으로 약 10m 떨어진 지점에서는 남-북 방향(N-8°-E)으로 길게 진행하는 목주열 2열이 확인된다. 두 둘은 4.2~4.4m 간격을 이루며 평행하게 진행하는 양상이다. 목주혈은 평면 방형 또는 장타원형으로 크기는 61×86㎝~74×109㎝ 정도로 거의 동일한 형태. 동일한 열을 이루는 목주혈 중심 간 거리는 약 85~100㎝. 개별 목주혈은 현재 30기가 확인. 단면 조사 결과 수혈 중심부에 목주를 세운 후 주위 공간을 사질토와 점토로 단단하게 메운 양상이 확인된다.
목곽고 석렬유구는 추정 서문지에 인접한 지점에서 확인되었다. 노출 석렬은 최대 폭 3.5m 정도로 넓은 U자형 평면을 그리며 성문 방향으로 넓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현재 정연한 면을 맞추거나 2단 이상 쌓아 올린 부분은 확인되지 않는다. 성내 용수 관리 및 배수 체계과 관련된 집수시설일 가능성이 높다.
'옥천 이성산성' 성내 발굴조사 성과, 일반인 공개
- 목곽고 비롯, 신라 산성유적으로는 드문 군집을 이루는 다수 원형수혈 확인
옥천군(군수 김재종)과 (재)한국선사문화연구원(원장 우종윤)이 발굴조사 중인 옥천 이성산성 (충북도 기념물 제163호) 발굴현장이 오는 8일 오후 14시 일반에 공개된다.
발굴현장 : 충청북도 옥천군 청성면 산계리 187번지 일원
<옥천 이성산성 위치>
이성산성은 해발 115~155m 높이를 이루는 구릉 상에 축성한 산성으로 구릉 정상부 능선의 자연지형을 따라 축조되었다. 성곽의 전체 둘레는 1,140m이고, 면적은 약 59,160 이다.
이번 조사는 이성산성의 성내 지역으로 산성의 남벽 및 서벽 부근에 해당한다.
지난 2015년에 실시한 1차 발굴조사에서 성벽을 대상으로 하여 토성의 축조방법을 확인하였다면, 이번 조사에서는 성내에 남아있는 유구*를 통하여 산성의 경영과 축조 목적을 파악하는데 주된 목표를 두었다.
"유구遺構[옛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
발굴조사에서는 목곽고(木槨庫)를 비롯한 목주열(木柱列) 2기, 석렬유구(추정집수시설) 1기 등이 확인되었으며, 특히 다수 군집을 이루는 원형 수혈(竪穴)이 조사되었는데, 신라 산성유적에서는 드문 경우이다.
저장시설의 용도로 사용된 원형수혈의 조성은 향후 이성산성의 축조 목적을 파악하는데 시사점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발굴조사를 진행한 (재)한국선사문화연구원 원장 우종윤은 “신라 토성 성벽의 축조기법과 산성 내부 공간구조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 이라고 밝혔다.
오는 8일 학술자문회의를 시작으로, 오후 14시 현장공개에서는 발굴조사된 내용을 관련 주민 및 학계 연구자들에게 소개하고 성과를 공유한다는 계획이다.
현장에서는 유적의 대한 내용 설명과 더불어 출토된 유물의 관찰 및 현장답사 등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황수섭 문화관광과장은 “2015년 실시된 이성산성의 긴급발굴조사 이후, 우리 지역에서 처음 실시되는 학술조사이다. 발굴이 완료되면 다시 볼 수 없기 때문에, 현장공개는 산성 유적의 발굴 성과를 확인하고 직접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또한 코로나-19 상황이 지속되는 만큼 참석자 전원에 대한 마스크 착용 및 체온 측정을 거치는 등 코로나-19 관련 문화유산분야 현장 대응 지침을 준수할 계획이다.
앞으로도 옥천군은 지역의 중요 문화자원이 주민과 공유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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