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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온달(溫達)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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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평강왕 때 일반 백성으로 젊을 적에는 바보라 했지만, 일약 왕의 부마로 발탁되어 군사 분야에서 주로 활동했다. 신라한테 빼앗긴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서쪽 땅을 찾겠다며 신라가 장악한 아단성(阿旦城)을 침공했지만 흐르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삼국사기 권제45 (열전 제5) 온달 : 온달(溫達)은 고구려 평강왕(平岡王) 때 사람이다. 얼굴이 못생겨 남의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마음씨는 밝았다. 집이 매우 가난해 항상 밥을 빌어다 어머니를 봉양하는데, 떨어진 옷을 입고 해진 신을 신고 저자 거리를 왕래하니, 그때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바보 온달이라 불렀다. 평강왕의 어린 딸이 울기를 잘하므로 왕이 놀리기를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는 대장부의 아내가 될 수 없으니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겠다”라고 하곤 했다. 왕이 매양 그렇게 말했다. 딸의 나이 16세가 되어 상부(上部) 고씨(高氏)에게로 시집보내려 하니 공주가 대답했다.“ 대왕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된다’고 하셨는데 지금 무슨 까닭으로 전의 말씀을 고치시나이까? 필부도 식언(食言)을 하지 않으려 하거늘 하물며 지존하신 분께서야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은 헛된 말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대왕의 명령은 잘못된 것이오니 소녀는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왕이 노해 말했다.“네가 나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정말 내 딸이 될 수 없으니 어찌 함께 있을 수가 있으랴? 너는 갈 데로 가는 것이 좋겠다.”이에 공주는 보물 팔찌 수십 개를 팔꿈치에 매고 궁궐을 나와 혼자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을 만나 온달의 집을 물어 그 집에 이르렀다. 눈 먼 늙은 할멈이 있음을 보고 앞으로 가까이 가서 절하고 그 아들이 있는 곳을 물으니, 늙은 어머니가 대답했다.“우리 아들은 가난하고 추하여 귀인이 가까이할 인물이 못됩니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이상하고, 손을 만지니 부드럽기가 풀솜과 같은즉 반드시 천하의 귀인이요. 누구의 속임수로 여기에 오게 되었소?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산으로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간 지 오래되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공주가 나와 걸어서 산 밑에 이르러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것을 보고, 공주가 그에게 마음 속에 품은 바를 말하니 온달이 성을 내며 “이는 어린 여자의 행동할 바가 아니다. 분명코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이다.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 하며 그만 돌아보지도 않고 갔다. 공주는 혼자 [온달의 집으로] 돌아와 사립문 아래서 자고, 이튿날 다시 들어가서 어머니와 아들에게 상세히 말하였는데, 온달은 우물쭈물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 어머니가 말했다.“내 자식은 지극히 누추하여 귀인의 배필이 될 수 없고, 내 집은 지극히 가난하여 귀인의 거처할 곳이 못되오.” 공주가 대답했다. “옛 사람의 말에, 한 말 곡식도 방아 찧을 수 있고, 한 자 베도 꿰맬 수 있다 했습니다. 진실로 마음만 맞는다면 어찌 반드시 부귀한 후에야 함께 지낼 수 있겠습니까?” 이에 금팔찌를 팔아 농토와 집, 노비, 우마와 기물 등을 사니 살림살이가 다 갖추어졌다. 처음 말을 살 때에 공주는 온달에게 말했다.“아예 시장 사람들의 말은 사지말고 꼭 국가의 말을 택하되 병들고 파리해서 내다 파는 것을 사오도록 하시오!”온달이 그 말대로 하니, 공주가 매우 부지런히 먹여 말이 날마다 살찌고 건장해졌다.  고구려에서는 항상 봄철 3월 3일이면 낙랑(樂浪) 언덕에 모여 사냥하고, 그날 잡은 산돼지·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의 신께 제사를 드렸는데, 그 날이 되면 왕이 나가 사냥하고, 여러 신하와 5부 병사가 모두 따라 나섰다. 이에 온달도 기른 말을 타고 따라 갔는데, 그 달리는 품이 언제나 앞에 서고 포획하는 짐승도 많아 다른 사람으로 그를 따를 만한 이가 없었다. 왕이 불러 그 성명을 물어보고는 놀라며 또 이상히 여겼다. 이 때 후주(後周) 무제(武帝)가 군사를 보내 요동(遼東)을 치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이산(肄山) 들에서 맞아 싸울 때,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날쌔게 싸워 수십여 명을 베자, 여러 군사가 승세를 타고 분발하여 쳐서 크게 이겼다. 공을 논할 때에 온달을 제일로 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왕이 가상히 여기고 칭찬하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내 사위다”고 하고는 예를 갖추어 맞이해 작위를 주어 대형(大兄)을 삼았다. 이로 해서 은총과 영화가 더욱 많아졌고, 위엄과 권세가 날로 성해졌다. 영양왕(陽王)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었다.“신라가 우리 한강 이북의 땅을 빼앗아 군현을 삼았으니, 백성들이 심히 한탄하여 일찍이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어리석은 이 신하를 불초하다 하지 마시고 군사를 주신다면 한번 가서 반드시 우리 땅을 도로 찾아오겠습니다.” 왕이 허락했다. 떠날 때 맹세하기를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이서(以西) 땅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고는 나가 신라 군사들과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싸우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넘어져 죽었다. 장사를 지내려 하니 상여가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아 돌아갑시다”고 했다. 마침내 들어 장사하니 대왕이 듣고는 몹시 슬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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