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는 일제시대 중등교육과정에 중학과 고보 둘이 있다는 이야기는 이미 썼다.
이중 중학은 대개 일본인들이 다녔고, 고보는 조선인들이 다녔는데, 1922년 2차 조선교육령 이후 5년으로 동일한 학제가 되었다.
중학과 고보는 학생 구성원에 차이가 있고 한참 배우는 젊은 학생들이라 양자간 상당한 알력과 경쟁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는 일제시대 조선인 1고보, 2고보, 3고보를 자임했던 세 학교 (경성고보, 평양고보, 대구고보)의 이야기를 좀 적어보고자 한다.
일제시대 대도시에는 대개 같은 이름의 중학과 고보가 같이 있었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서울에는 경성중학 (일본인)과 경성1고보 (나중의 경기고), 경성2고보 (나중의 경복고)가 있었고,
평양에는 평양중학 (일본인)과 평양고보
대구에는 대구중학 (일본인)과 대구고보 (나중의 경북고)가 있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어 있지만, 조선인이 주로 다니는 고보는 중학과 관련짓는 것 보다 고보들끼리 연결의식을 가지고 따졌다.
예를 들어 전술한 바와 같이 전혀 공식적인 부분이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경성1고보, 평양고보, 대구고보가 설립 순서를 따져 교표에 줄을 한개, 두개, 세개를 그려 넣는다던지,
경성2고보가 생겨 교표에 줄을 두개 그어 넣으려 하니 평양고보가 반대해서 위아래 줄 두께를 달리하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던지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일제시대 당시 조선인들은 고보야 말로 자신들이 다니는 학교로 일본인들이 다니는 중학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의식이 강하고 경쟁의식도 강했다고 본다.
언젠가 한번 쓴 것 같지만, 1938년 3차 교육령으로 조선의 고보를 없애고 모두 중학으로 전환하면서 중학과 고보의 명칭에 혼선이 빚어졌다.
고보와 중학이 나뉘어 있을 때에는 문제가 안 되었던 같은 학교 이름이 중학으로 통일되면서 문제가 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경성1고보와 2고보의 경우, 경성중학을 피해 경기중과 경복중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반면 평양고보의 경우, 중학으로 전환하면서 "평양2중"이 되어야 했는데 일본인이 다니던 "평양중"이 "평양1중"이 되었기 때문이다.
평양고보생들은 자신들이 먼저 생긴 학교인데 왜 우리가 2중이냐고 격렬히 저항했었다는데 총독부의 회신은 평양중이라는 이름을 먼저 쓴 학교가 있으므로 설립연도와는 무관하게 평양고보가 2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평양고보생들은 당시 학교 간판의 평양 2중이라는 이름에서 작대기 하나를 지워 1중으로 고쳐 쓰고는 했다던데 이 학교 졸업생 분들을 보면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대구고보의 경우, 경성1고보와 같은 방식의 해결책을 택했다. 대구고보를 경북중으로 바꾼 것이다.
원래 있던 대구중은 여전히 일본인 학교로 남았으므로 대구중과 경북중 두 개가 38년 이후 대구에 병존하게 되었다.
그리고 해방-.
해방이 되자, 일본인들은 귀국하고 구 일본인 학교들은 날개 떨어진 새가 되었다.
학교가 전통을 이어 가려면 동문이 정말 중요한데 일본인들이 철수해버린 구 일본계 중학들은 해방과 동시에 학교가 날라가 버린 것이다.
해방이후 구 조선계 고보와 일본계 중학의 운명을 써 보면,
먼저 경기중 (구 경성1고보)과 경복중 (구 경성2고보)의 경우, 해방과 함께 경기고와 경복고가 되었다.
구 경성중은 해방과 함께 해체되었고 그 자리에 조선인학교인 서울고가 세워졌다.
서울고는 경성중이 있던 부지에 만들어 졌지만, 공식적으로 경성중과의 관계는 부정한다. 하지만 일본의 경성중 졸업생들은 서울고가 후신이라고 보는 모양이다.
평양2중 (평양고보)과 평양1중 (평양중)의 경우 북한 정권의 수립과 함꼐 두 학교 모두 사라졌다.
단, 평양중의 동문회는 일본인들로 거의 유지되지 않는 반면 태반이 월남했다는 평양2중 (평양고보)는 아직도 동문회가 활동 중이다.
경북중 (대구고보)의 사례가 재미있다.
경북중은 해방 이후 경북고가 되었다.
그러면 구 대구중은 어찌 되었을까? 일제시대 중학은 해방되면서 5년제 중학이 3년제 중학교와 3년제 고등학교로 나뉘어 진 것이 보통이었는데, 대구중은 고등학교과정은 폐지해 버리고 대구중학만 남겨버렸다.
이것이 끝이 아니고, 경북중학 5년제가 고등학교와 중학교로 나뉘면서 생긴 "경북중"을 "대구중학교"로 이름을 바꾸면서 이 학교를 대구 1중학교로 하고, 일제시대 대구중학은 대구2중학교로 바꾸어 버렸다.
일본인이 다니던 대구중학을 사실상 대구2중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해방 이후, 2차 교육령 시절 5년제 조선인 고보의 후신들이 다수 해방 이후 한국교육에서 고등학교 교육의 최정점에 올라갔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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