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값에 노동력 운용, 설립자 대부분은 열렬한 노예제론자

영국 구빈원들workhouses은 노예 제도에서 얻은 부에 기반하여 설립되고 유지되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by 카디프 대학교
출처: Pixabay/CC0 퍼블릭 도메인
카디프 대학교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영국 구빈원은 근대 초기부터 노예 제도 및 제국주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Antipode 저널에 게재된 이 논문은 산업 자본주의 성장기에 영국 구빈원을 빈곤과 노동을 관리하는 국내적 메커니즘으로만 이해하는 데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 연구는 오히려 영국 구빈원이 18세기 초부터 19세기 중반까지 대서양 세계를 특징짓는 노예 제도, 식민주의, 인종 착취라는 세계적 시스템에 깊이 얽혀 있었음을 보여준다.
저자들은 방대한 기록 자료를 활용하여 영국과 식민지 간 사람, 돈, 그리고 규율 관행의 이동을 추적한다.
저자들은 구빈원이 노예 제도에서 얻은 부로 자금을 조달하고, 식민지 무역을 위한 상품을 생산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구빈법 기관과 노예 소유 기업 모두에 관여하는 인물들이 운영했음을 보여준다.
이 연구는 구빈원-농장 연계workhouse-plantation nexus라는 개념을 소개하며, 구빈원과 식민지 농장이 공동 재정, 아이디어, 인프라, 그리고 행정 네트워크를 통해 어떻게 구조적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카디프 대학교 지리 및 계획대학 앤드류 윌리엄스Andrew Williams 박사는 "영국의 복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제국주의와 노예제와의 깊은 연관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대서양 노예 무역과 관련된 거대한 자선 유산에 주목했지만, 이 연구는 영국의 국가적 빈곤 관리가 노예제에서 비롯된 부와 식민지 착취에 의해 불가분의 관계로 유지되었던 더욱 미묘하고 일상적인 방식을 강조한다"고 말했다.
영국 최초의 구빈원 중 하나는 1696년 노예 무역 항구 도시 브리스톨에 설립되었다.
이전의 실패한 시도들과 달리 브리스톨 구빈원의 성공은 주로 후원자들의 상당한 재정 지원 덕분이었다.
후원자 중 상당수는 저명한 노예상이었다.
현재 브리스톨의 M 셰드 박물관M Shed Museum에 상설 전시된 에드워드 콜스턴Edward Colston 동상도 그러한 후원자 중 한 명이었다.
설립자인 존 캐리John Cary MP(하원의원)는 부유한 설탕 상인이자 노예 무역의 열렬한 옹호자였으며, 카리브해 노예 농장과 직접적인 가족 및 사업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
조사 결과 캐리는 1700년에 243명의 아프리카 노예를 아메리카 대륙으로 밀수한 노예선 메리Mary호의 공동 소유주이기도 했다.
이러한 재정적 관계 외에도 구빈원은 노예 경제를 직접적으로 지원했다.
수감자들은 린넨, 모직물, 그리고 노예선의 코킹caulking에 사용되는 오컴oakum과 같은 상품을 생산했다.
구빈원이 있던 바로 그 건물은 이전에 노예 농장에서 생산된 설탕을 가공하는 설탕 정제소로 사용되었다.
브리스톨을 비롯한 여러 지역 구빈원 수감자, "부랑자vagrants", 그리고 부양받을 자격이 없는 빈민들은 영국 식민지로 이송되어 구빈원 비용을 경감하고, 계약 노동자의 적절한 공급원으로 활용되었다.
이 연구는 또한 1720년대 초 리버풀의 빈민 구제 수요가 급증하면서 노예 무역에 깊이 연루된 개인들로부터 숙소를 조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특히, 6,000명이 넘는 아프리카 노예를 거래한 저명한 담배 상인이자 사략선 선장이며 노예선 소유주였던 브라이언 블런델Bryan Blundell은 빈민들을 위해 36채 오두막을 임대했다.
1732년에 지은 리버풀 최초의 구빈원은 블런델의 블루 코트 자선 학교에서 건립했다.
존 브룩스John Brookes와 찰스 구어Charles Goore를 포함한 이후의 감독관과 교장들은 노예 무역과 노예 생산품에 직접 관여하여 부를 축적한 매우 영향력 있는 시민 인물이었다.
존 브룩스의 아들인 조셉 브룩스Joseph Brooks는 저명한 노예상인으로, 1769년부터 1772년까지 리버풀에 새로운 "산업의 중심지" 건설을 감독했다.
그의 조카 조셉 브룩스 주니어Joseph Brooks Junior는 1784년과 1802년에 리버풀의 집행관을 지냈을 뿐만 아니라, 43차례의 노예 항해에 참여했고 악명 높은 노예 운반선 브룩스Brooks호를 소유했다.
이 연구는 또한 영국 구빈원과 대서양 노예 농장 간 간과된 이념적 연관성을 조명하여, 이러한 기관들이 어떻게 영국의 상업 제국 확장에 필수적인 상호 연결된 시스템으로 구상되었는지를 밝힌다.
상업 및 농장 위원회Board of Trade and Plantations (BOT) 창립 멤버였던 존 로크John Locke[그 유명한 존 로크인가?]는 구빈원을 체계적으로 "잉여 노동력surplus labor"을 조직하여 상업 확장을 위한 상품을 생산하는 기관으로 생각했다.
존 캐리John Cary를 비롯한 구빈원 설립자들 영향을 받은 로크는 "영국 무역을 개선하고, 영국 농장을 지원하고, 빈곤층 고용 방안을 고안"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공동 저자인 런던 퀸 메리 대학교 존 메이Jon May 교수는 "이번 연구는 구빈원과 농장이 영국의 상업 전략에 얼마나 필수적인 역할을 했는지 보여줌으로써 기존의 통념에 도전한다. 로크와 그의 동시대인들은 이러한 기관들을 공생적인 것으로, '개량improvement'이라는 미명 하에 생산 노동력과 새로운 제조품 시장을 모두 제공하는 기관으로 여겼다"고 말했다.
윌리엄스 박사는 이렇게 덧붙였다.
"최근 몇 년 동안 노예제도의 참상과 영국 구빈원에서 극빈자들이 견뎌야 한 가혹한 환경 사이에 잘못된 동일시가 있었습니다. 해외로 이송된 백인 계약 노예나 영국의 면방, 공장, 광산에서 강제로 끌려간 아동 '도제apprentices'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곳에서는 영국 극빈자들의 고통을 '백인 특권white privilege'이라는 개념을 무시하고 노예 제도에 대한 배상의 필요성을 축소하는 데 이용합니다."
"저희 연구는 구빈원과 농장이 어떻게 상호 연결되어 있었는지 보여주지만, 이러한 시스템을 결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대서양을 횡단한 노예제도는 그 본질과 영향 면에서 독특했습니다. 영구성, 세습적 지위, 잔혹한 인종화와 비인간화, 성폭력, 강제 출산,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강제 이송된 1,250만 명이 넘는 아프리카인 노예들의 규모는 32만 명의 계약 노예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결과적으로, 그 심오한 유산은 다른 노동 시스템의 백인 후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흑인의 삶에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역사 지리학, 흑인 지리학, 그리고 기억의 정치학에 대한 더 폭넓은 논의에 기여하며, 영국의 복지 기관의 형성과 그 지속적인 인종적 유산에 대한 중요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More information: Andrew Williams et al, Racial Capitalism and the Workhouse–Plantation Nexus in the Atlantic World, Antipode (2025). DOI: 10.1111/anti.70038
Provided by Cardiff University
'NEWS & THESIS' 카테고리의 다른 글
350년 된 볼리비아 '잉카' 미라 두상, 알고보니 현지 원주민 (0) | 2025.09.14 |
---|---|
나치가 약탈한 네덜란드 꽃 그림 두 점 오하이오 경매 나왔다가 중단 (0) | 2025.09.14 |
3,300년 이집트 호루라기, 왕릉 '경찰관'이 사용한 듯 (0) | 2025.09.14 |
공룡은 어떻게 노래했을까? 악기 연주로 되살리는 사람들 (1) | 2025.09.14 |
스톤헨지 이전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기념물 오스트리아서 출현 (0) | 2025.09.1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