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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350톤 김해 구산동 고인돌묘(?) 아래서 토광묘???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1.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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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산동 고인돌
2006년 조사 당시 구산동 고인돌 

 

실제 조사에 간여하는 사람도 그렇겠지만 기자 역시 그에 간여했느냐 아니냐에 따라 친소감이 달라지게 마련이라, 이 경우 기자로서의 간여란 당연히 관련 기사 작성을 말한다. 직접 현장을 경험하진 못했다 해도, 이 짓도 해 보면 직접 내가 자료를 찾거나 받아 그걸 토대로 해서 써 봤느냐 아니 했느냐에 따라 왕청나게 이후 경험이 다른 법이라, 뭐 현장을 꼭 봐야 기자노릇하는 것도 아니니, 관건은 내가 얼마나 열정을 두고 몰입한 적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차후 그에서 돌발하는 관심도가 갈라지기 마련이라 

 

돌이켜 보건대 내가 일선 취재기자로 뛸 적에 모든 문화재 관련 현안은 나를 통해 발신하며, 나로써 수렴한다는 그런 자부심? 혹은 자만심이 있었거니와, 그래도 살다 보면 어찌 그런가? 하다 못해 내가 휴가 간 때에 큰 일이 있을 수도 있고(남대문 태워 먹을 적에 나는 해외에 있었다), 나 대신 다른 기자가 간여하기도 하니 마련이다. 

 

2006년 조사 당시

 

2006년 김해 구산동 고인돌이 그러했으니, 그 막중한 발견 발굴 의미에 견주어 이 흔적은 공개될 무렵에 내가 간여하지 못한 경우에 해당한다. 다만 그럼에도 내가 이것이 중요한 줄은 알았으니, 그럼에도 내가 직접 간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언제나 먼산 쳐다보듯 했을 뿐이다. 

 

그런 구산동 고인돌이 근자에 다시 눈에 띄기 시작했으니, 다음과 같은 국제신문 2021년 03월 24일자 8면, 박동필 기자 보도가 그것이라 

 

세계 최대 추정 ‘김해 구산동 고인돌’서 토광묘 흔적 확인
김해시, 전문가 자문회의 개최…수로왕 이전 시기 고인돌 가능성

 

 

 

세계 최대 추정 ‘김해 구산동 고인돌’서 토광묘 흔적 확인

- 강력한 부족사회 존재했을 수도 - 문화재청에 정식 발굴 요청 예정 무게 350t의 세계 최대 규모로 추정되는 ‘김해 구산동 고인돌’ 하부에서 토광묘 흔..

www.kookje.co.kr

 

본문을 훑어보면, 무게 350톤에 달하는 구산동 고인돌 덮개돌 아래쪽에서 토광묘土壙墓 흔적이 확인됐다는 것이어니와, 이런 성과는 그간 이 상석과 그 주변 부대시설을 두고 청동기시대 무덤이냐, 아니면 모종의 제단祭壇이냐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논쟁에서 무덤 쪽 승리를 선언하는 것이란다. 

 

좀 더 자세히 보면, 삼강문화재연구원이라는 데서 이번에 다시 조사한 결과 고인돌 아래로 넣은 트렌치에서 그런 성과가 나왔다 하거니와, 주목할 만한 점은 자문위원인 임학종 전 국립김해박물관장 평가다. 그는 이를 “기원전 4세기 전후의 토광묘 흔적 일부”로 간주하면서 “추가로 발굴하면 토광묘 내부에 나무관(목관묘)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를 제출했다. 

덧붙여 같은 자문위원인 이영식 인제대 교수(얼마전 퇴임했으니 전 교수다)는 “돌 아래 흙 상태를 보니 청동기시대 토광묘, 철기 시대 목관묘 흔적이 동시에 나온다는 점에서 특이하다”고 했다.

 

정비 계획인가? 

 

적어도 보도로만 보면 두 사람은 저 거대한 돌덩이가 고인돌묘 덮개돌이며, 그 덮개돌 아래에는 사람을 묻은 흔적이 있을 것이라는 견해를 표출한 셈이다. 

 

한데 이 보도를 접하면서 내가 영 께름칙한 데가 있었다. 인터넷 판을 참조해서인지는 몰라도 토광묘 흔적이라 간주할 만한 증거가 첨부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이번 트렌치 조사가 정확히 이 유적 어디를 찔러 확인한 것인지가 아리숑숑했다. 

 

그리하여 이를 발굴한 조사단과 문화재청 발굴제도과를 통해 조사단이 제출한 정확한 조사성과 보고서를 요청했으니, 그리하여 어제 조사단인 삼강문화재연구원(경남고고학연구소가 이름을 바꾸었을 것이다)이 작성한 김해 구산동 지석묘(도 기념물 제280호) 정비사업부지 내 매장문화재 시굴조사 학술자문회의자료 를 얻어 분석해 봤다. 

 

그 결과를 내 식으로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구산동 고인돌은 그것이 고인돌묘이건, 제단이건 관계없이 소위 무게 350톤에 이른다는 그 상석까지 모조리 인위로 설치한 구조물 맞다.

 

2. 이를 만든 시기는 확실치는 아니하나, 조사단 추정을 따른다면 "상석上石 동쪽 인접지에서 확인되었던 송국리문화층(기원전 8~4세기)의 A2-3호 주거지 위에서 구산동 지석묘 동쪽 기단석열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구산동 지석묘는 늦어도 기원전 4세기의 송국리문화 말기 이후 또는 송국리문화가 소멸된 뒤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토광묘라고 언론에 보도된 흔적은 토광묘라고 단안하기에는 너무 이르며, 더구나 그 발견 지점은 덮개돌 아래가 아니라 정확히는 그 한 쪽 측면이다. 다만 그 흔적이 덮개돌 아래쪽으로 확장되는 듯하다. 

 

2006년 조사 이래 이번 재발굴(정확히는 시굴조사)를 종합해 조사단은 

 

이러한 구산동지석묘의 시기를 고려하면 제단식이 아닌 매장시설을 갖춘 기단묘基壇墓일 가능성이 높다.

 

라는 추론을 제시한다. 

 

기단묘란 조사단장 최종규가 제시한 개념으로,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없다. 기단, 그러니깐 바닥 시설을 갖춘 무덤이라는 뜻이거니와, 실제 그 상석 주변과 그 측면에서 드러난 토층 양상을 보면 바닥에 몇 겹으로 돌판을 깐 사실이 확인된다. 

 

 

이것이 최종규가 말하는 모식도다. 그가 왜 굳이 기단묘라는 용어를 새로 맹글어 부르는지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 

 

그렇다면 이번에 드러난 트렌치 양상은 어떠한가?

 

 

이것이 2006년 조사 결과 드러난 유적 배치 양상이다. 붉은 네모 한가운데 떡가래처럼 좌우로 걸친 것이 이른바 고인돌 덮개돌이라는 괴물로 무게 350톤이라는 것이며, 이를 중심으로 정확히 남북 방향으로 그 양쪽으로 돌담장 같은 시설이 길쭉하게 확인된다. 아스팔트 포장하듯이 그 안쪽으로는 돌들을 깔았다. 마치 조선왕릉 신도神道 같다. 바로 이 점에서 이것이 제단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제시된 것이다.

 

 

2006년 이 발굴 사진을 보면 내 말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상석이라 부르는 저 덮개돌은 길이 10m, 너비 4.5m에 무게는 350~400톤으로 추산한다. 것도 일부가 깨져 나간 상태에서 말이다.

 

이를 중심으로 남북 방향으로 마련한 이른바 기단석렬은 현재까지 확인된 규모만 남북 길이 85m에 너비 19m에 달한다. 저에다가 그 바닥에 박석을 깐 모습을 견주어 조사단은 "마치 로마의 아피아 街道를 연상케 한다"고 표현한다.

 

이를 만든 정확한 시기를 확인할 수 없고, 그 정확한 기능이 무덤인지 제단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암튼 저런 거대한 시설을 가야 왕국이 생겨나기 전, 아마도 청동기시대 말기, 혹은 빠르면 철기시대 개창기 무렵에 만들었다는 자체가 실은 놀랍기만 하다. 간단히 말해 경주 봉황대고분이나 황남대총 같은 거대한 건축물을 저 시기에 만들었다는 것이다.

 

뭐 스톤헨지니 피라미드에 놀라곤 하는데, 솔까 4백톤에 달하는 저 거대한 돌덩이를 얹은 시설을 만든 그 자체는 더 놀라운 발상이다. 

 

 

암튼 이걸 다시 팠다. 덮개돌 중심으로 본 장면이다. 

 

 

1Tr이라고 적은 부분이 문제의 토광묘 흔적이 나왔다는 트렌치다. 보다시피 이번 조사는 덮개돌 아래를 조사한 것이 아니라 그 측면 한 부분을 팠다. 다음에는 그 양상을 본다.  

 

 

이것이 바로 토광묘 흔적이라 언론에 보도된 부분이다. 문제는 토광묘인지 나는 모르겠다. 전문가들이니 정확히 봤다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현재로서는 토광묘일 가능성이 있는 흔적 정도로 봐주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건 그렇고 이것이 제단이냐 무덤이냐 하는 논란이 있다 했거니와, 내 늘상 말하듯이 무덤 역시 제단의 일종이다. 이 점을 망각하면 안 된다. 왜 고고학도들이 제단을 이리도 모르는지 도통 이해가 안 간다. 무덤이 제단 아니면 무슨 개뼉다귀란 말인가?

 

그것이 무덤이건 제단이건 관계없이 중요한 것은 저 거대한 건축물 일체가 우리로서는 선사시대에 한반도에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무덤이면 어떻고 제단이면 어떤가? 그렇다 해서 저 일체가 인위적 시설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니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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