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비로운 왕국에서의 전쟁과 탈출: 삼성퇴Sanxingdui 청동기 시대 붕괴에 대한 새로운 단서를 열다
새로운 이론이 중국에서 가장 수수께끼 같은 고고학 유적 중 하나를 바라보는 학자들의 시각을 바꾸고 있다.
베이징대학교 쑨화Sun Hua 교수에 따르면, 고대 촉나라 수도였던 삼성퇴의 내란이 약 3,000년 전 대량 이주, 성벽 파괴, 그리고 의례 공간의 소멸을 촉발했을 가능성이 있다.
쑨화 교수는 최근 쓰촨성에서 열린 학술 포럼에서 정치적, 종교적 지배를 위한 전쟁이 삼성퇴 후기 문화 시기를 분열시켰다고 주장했다.
쑨화 교수는 "증거에 따르면 이 전쟁은 삼성퇴 국가 내부의 갈등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가장 큰 피해를 겪은 집단은 종교 및 의례 업무를 담당한 신권 귀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가면과 신비의 도시
쓰촨성 더양시에 위치한 삼성퇴는 20세기 최고의 고고학적 발견 중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20년대에 처음 발견되어 1980년대에 극적으로 드러난 이 유적은 거대한 청동 유물들로 연구자들을 놀라게 했다.
응시하는 듯한 눈을 지닌 거대한 가면, 청동으로 주조된 우뚝 솟은 나무, 그리고 중원 왕조 시대의 유물과는 전혀 닮지 않은 금으로 만든 홀笏 등이 전시되어 있다.
고고학자들은 삼성퇴에서 세 가지 문화 단계를 확인했다.
가장 초기 단계는 청두 평원을 따라 성벽으로 둘러싸인 정착지가 생겨난 시기였고, 중기 단계는 촉나라의 번영하는 수도로 변모하는 시기였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는 분열의 흔적을 보여준다.
성벽이 무너지고, 수로가 변경되고, 건설이 중단되고, 청동, 옥, 금, 상아로 가득 찬 제사 구덩이가 갑자기 매장되었다.
쑨화는 이러한 과정을 내전의 증거로 해석한다.
패배한 세력, 즉 제사 의식을 주관했던 의례적 엘리트 집단은 정치적, 정신적 권위를 모두 잃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삼성퇴 내 북서쪽 작은 도시로 이주하거나 수도를 완전히 버리고 쓰촨 분지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보물과 제사 갱
1986년부터 고고학자들은 이곳에서 8개 대형 갱을 발굴했으며, 각 갱에는 수백 점 진귀한 유물들이 담겨 있다.
여기에는 눈이 튀어나온 실물 크기 청동 두상, 금박을 입힌 가면, 코끼리 상아, 정교하게 세공된 옥, 그리고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의식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정교한 청동 나무가 포함된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가장 큰 것을 포함하여 네 개 구덩이가 기원전 1200년에서 1010년 사이에 발견되었는데, 이는 중국 북부의 상나라 후기와 겹치는 시기다.
이처럼 귀중한 유물을 매장하기로 한 결정은 고고학의 큰 수수께끼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신에게 바친 제물이었을까, 위기 상황 속 긴급 은폐였을까, 아니면 쇠퇴하는 도시를 상징적으로 봉쇄한 것일까?
삼성퇴와 상나라: 두 세계, 한 시대
삼성퇴 문명은 중국 최초의 역사적 기록으로 남은 상나라와 공존했다.
상나라는 갑골문(현재 알려진 가장 오래된 중국 문자)을 남겼지만, 삼성퇴에서는 아직 문자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러한 부재는 삼성퇴 문명의 미스터리를 더욱 심화한다.
거대한 청동을 주조할 만큼 발전된 국가가 어떻게든 그들의 세계관을 설명할 문헌을 남기지 못한 걸까?
두 사회는 동시대에 존재했지만, 놀라운 방식으로 차이를 보였다.
상나라 청동기에는 일반적으로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며, 술과 음식을 바치는 조상 제사에 사용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삼성퇴 유물은 다른 영적 풍경을 보여준다.
눈이 과장된 가면은 신의 계시에 대한 믿음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으며, 청동 나무는 우주의 연결을 상징할 수 있다.
일부 학자는 삼성퇴의 제의가 상나라의 조상 숭배와는 다른 샤머니즘적 관습과 다산 숭배에 중점을 두었다고 주장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상나라와 촉나라 지역이 고립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고학적 증거는 쓰촨과 중원 사이에 옥, 상아, 심지어 코끼리 뼈까지 이동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두 문명 사이에 무역이나 외교, 그리고 어쩌면 경쟁 관계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상나라 왕들이 점술을 꼼꼼하게 기록한 반면, 삼성퇴의 침묵은 여전히 귀청이 터질 정도로 고요하다.

움직이는 인구
쑨화는 삼성퇴의 문화적 변화가 건축과 장례 관습의 변화로 특징지어졌다고 강조하며, 이는 대규모 인구 교체를 시사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 시기에 다른 문화권에서 온 새로운 이주민들이 청두 평원으로 유입되어 이 지역 인구 구성을 변화시켰다.
이러한 이주의 물결은 삼성퇴를 거대한 수도에서 제2의 도시로 변모시켰고, 불과 50km 떨어진 금사金沙와 같은 후대의 권력 중심지로 발전하는 길을 닦았을 것이다.
삼성퇴 사람들이 흩어졌다는 사실은 쓰촨 분지 전역에 새로운 정착지가 갑자기 생겨난 이유를 설명할 수 있으며, 이는 이 지역의 사회 발전에 새로운 국면을 시사한다.
고대 붕괴의 현대적 메아리
오늘날 삼성퇴는 단순한 고고학 유적지가 아니다.
중국 고대의 다양성을 상징하는 곳이자 문화 외교의 원동력이다.
디지털 전시를 통해 해외로 가져가기에는 너무 약하거나 귀중한 유물을 포함하여 삼성퇴의 보물들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연구가 계속됨에 따라 고고학자들은 삼성퇴가 멸망한 이유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고자 한다.
과연 순수한 내부 갈등이었을까? 홍수나 지진과 같은 환경적 압력이었을까?
아니면 외부 경쟁자와의 접촉이었을까?
답이 무엇이든, 삼성퇴 이야기는 가장 강력한 청동기 시대 문명조차도 내부에서 분열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으로서는 무너진 성벽과 묻힌 청동 유물들이 중국의 신비로운 촉나라의 운명을 바꾼 잊혀진 전쟁의 침묵하는 증인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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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화 주장이라 해서 그것이 정답이겠는가? 고육지책에서 나온 답변에 지나지 않는다.
삼성퇴 문명은 모두 다 미스터리다.
첫째 그 느닷없는 등장이 미스터리다.
둘째, 그 전개가 미터스터리다.
셋째 멸망 혹은 쇠퇴 역시 미스터리다.
왜?
단 하나도 저것들을 짐작할 구석이 없는 까닭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이 구축한 문명 자체가 미스터리다.
왜 저리 아까운 황금 가면과 청동가면, 청동나무 같은 금속 유물들을 구덩이다가 무더기로 묻었을까?
약탈이나 침략과 같은 과정이라면 있기 힘든 일이요, 무엇보다 저 정도 청동이라면 녹여서 재가공을 얼마든 할 수 있음에도 그렇지 아니해서 이 역시 미스터리다.
내분이 일어나지 않고 망하는 문명 혹은 국가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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