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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소문국에 뿌리를 둔 진골정통과 왜倭에서 비롯하는 대원신통, 신라의 두 가지 족외혼 왕비 공급망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6.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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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 왕비를 공급한 신라 외부 사회. 그 양대 산맥이 조문국과 왜국이었다. 이 왜국 문제는 실은 소위 임나일본부랑 밀접하다.

 
신라는 김부식도 말했듯이 근친혼이 극심했으니, 실은 이렇게 말하는 김부식 시대 고려 사회 역시 마찬가지라, 이건 뭐 콩가루도 이런 콩가루는 없어 당장 고려 왕조 왕비만 해도 근친혼이라, 아버지가 다르면 오누이 결혼이 성행했다. 

사정이 이런 데도 김부식은 그 유명한 삼국사기 논찬에서 그래도 지 어미(실제는 생모가 아니라 첩이었지만)를 부인으로 취한 흉노보다는 낫다 했으니, 이 심사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야를 포함해 삼국시대로 표상하는 한국고대사회는 철저한 족외혼 지향이라, 배필은 모름지기 다른 씨족에서 구했다.

이 혐의를 피하고자 고려 왕조는 종모성從母姓이라 해서, 아버지가 같고 어머니가 다를 경우 딸만큼은 엄나 성, 곧 외할아버지 성을 따랐다. 

이렇게 되면 이성異姓과의 결합이 되어 모름지기 그 사회는 족외혼을 해야 한다는 혐의를 피해갔다. 

고구려는 말할 것도 없고, 백제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고구려야 후한서 동이전과 삼국지 동이전에 그런 증언이 우뚝하고, 백제의 경우 그런 사정이 잘 드러나지 않기는 했지만,

근자 공개된 미륵사 석탑 봉영 사리기를 보면 명백해서, 실제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같은 부여씨일 수밖에 없지마는, 암튼 사탁씨라고 칭한 씨족에서 무왕이 왕비를 취했다는 사실이 폭로됐거니와

중국 기록에 백제를 증언하면서 그 대표 국성國姓이라 거론한 8개 성씨가 실은 이 왕비를 공급하는 명목상의 비非부여씨였으니, 

문제는 우리는 왕비를 공급한 씨족만 생각했지, 부여씨 왕실 여인들의 하가下嫁를 고려하지 않았으니, 부여씨 왕실 여성들이 배필을 구하는 상대는 저 8개 씨족 말고는 없다! 아무나한테 시집가? 그딴 짓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없다. 

가야의 경우 건국시조 김수로는 아예 삼국유사에 의하면 인도 아유타국 왕녀 허황옥을 거론했으니, 화랑세기에 의하면 아유타국이 아니라 용성국 출신이다. 

암튼 그 내막이 인도건 용성국이건 이는 족외혼을 증언하거니와, 신라 건국시조 박혁거세 역시 마찬가지라, 혁거세 자체가 아예 외부 출신이라, 당시 신라 사회(물론 신라가 건국하면서이겠지만) 내부에서 배필을 구했으니, 그가 알영이다.

미추왕 이전 신라 왕실이 어떤 방식으로 족외혼을 구현했는지는 확실치 아니하나, 혁거세-알영에 의한 신라 건국 이래 내부에서 작동하는 족외혼 시스템이 있었다.

이 족외혼에 따라 실제 생물학적으로는 극심한 근친이건 뭐건 상관없이, 다른 씨족으로 분류된 가문 혹은 씨족에서 배필을 구했음은 명백하다.

이런 사정이 미추왕 시대 지금의 경북 의성에 기반을 둔 소문국(조문국) 정벌을 계기로 일별하게 되는데, 이 무렵은 신라가 정복 국가를 실은 완성하는 시점이라, 주변 소국들을 부용국으로 삼다가 야금야금 다 잡아먹기 시작하다 마침내 그 대미를 소문국 정벌로 일단은 마무리하게 되었거니와(훗날 가야제국 병합을 2차 신라 정복 시대, 다시 그 훗날 일통삼한을 3차 신라 정복시대로 볼 수 있다)

이 소문국 정벌이 신라 왕실 혼인 시스템에는 일대 변화를 초래했으니, 이 점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는 확실히 보이지 않으나, 화랑세기를 통해 명백히 드러났다. 

미추왕은 유훈을 내리는데, 이 유훈이 신라 왕실 헌법 조문이 된다.

그건 바로 앞으로 신라 왕실은 왕비를 오직 소문국 혈통 여인에게서만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혈통을 진골정통眞骨正統이라 한다. 이 진골정통은 오직 모계로만 전승한다.

곧 엄마가 소문국 왕통이면, 그가 생산하는 모든 여인은 자동빵으로 진골정통이 된다.

남자도 한 대에 한해서 그런 혈통을 이어받는다 하지만, 의미 없다.

오직 중요한 것은 왕비를 공급하는 절대 자격이니, 모계로만 철저히 따져서 그 소문국 피를 이어받은 여인만이 신라 왕비로 간택된 것이다.

왜 신라가 이렇게 했는가? 소문국이기 때문이다.

신라랑은 피가 다른 소문국이라는 외부 씨족한테서 왕비를 데려오게 되니 이것이 당시 그 사회가 요구한 절대의 혼인 조건, 곧, 자고로 결혼은 족외혼이어야 한다는 기준을 완벽히 맞추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계로만 혈통을 따지게 되니, 저 제도가 처음 시행 때야 명실상부한 족외혼이었을지는 몰라도 시간이 좀 흐르면서 극심한 근친혼이 될 수밖에 없다.

엄마 피만 따진 반면 아버지 피를 따지지 않으니, 아버지 피가 뒤죽박죽이 되는 것이다.

이 모계 혈통에 기반한 진골정통은 놀랍게도 고려 왕실을 물들인 종모성 제도와 똑같다.

차이라면 당시 신라 사회는 성씨가 없었을 뿐이다. 신라 사회에 성씨는 훗날 생기게 되어 그것이 없던 시대에도 있었던 것처럼 기술되게 되지만, 이것도 단순한 후대의 부회가 아니라, 구별 장치였던 것이다. 
 

진골정통의 기원과 전개. 이종욱 선생 책에서 전재

 
한데 소문국 피로만 따지게 되니, 훗날 문제가 생기게 된다. 왕비 간택 범위가 너무 좁지 아니한가?

나아가 씨가 마를 우려도 없지 않았다.

덧붙여 다른 씨족 계통이 왜 너희만 그 좋은 왕비를 먹냐는 비판이 왜 없었겠는가?

이런 사정이 일변하게 되는 일이 눌지마립간 시대에 실제로 생기게 된다. 

그 직전 실성마립간 시대에 마립간한테 찍혀 저 멀리 왜국으로 인질로 간 미해(미사흔)가 형님이 이제 왕이 되었다 해서 귀환한 것이다. 

미사흔은 일본에서 인질 생활을 17년간인가 했다. 어린 시절에 갔으니, 돌아올 때는 실은 신라말로 어벙벙 제대로 하지 못했다. 

말이 인질이지, 신라국 왕자가 탱자나무 울타리에 갇혀서만 지냈겠는가? 또 혼자 지냈겠는가? 

미사흔은 노는 물이 달라서 왜국 왕실에서만, 것도 왜국 공주들하고만 놀았다. 

미사흔과 죽자사자 하던 공주 하나가 미사흔 귀국 때 신라로 따라 온다. 

돌아와서 왕궁으로 들어가 형님 눌지마립간을 배알할 때 미사흔은 이 야국野國 왕녀를 소개한다.

"오니짱, 고레와 아나따노 제수씨데쓰. 기레이나?"

이 왜국 왕녀가 미모가 출중해서 신라 사회 상층부에 안착하게 되고, 또 미사흔 말고도 다른 남자들이랑도 염문을 뿌리게 되는데, 암튼 이 미사흔과 왜국 공주에서 난 딸 하나가 훗날 왕비로 간택되어 들어간다. 

왜 왜국 피가 흐르는 여성이 신라 왕비가 되었는가?

간단하다. 소문국 공주가 그랬듯이, 완벽하게 마누라는 다른 씨족, 곧 신라 사회 외부에서 구해야 한다는 족외혼 조건을 완벽하게 만족하기 때문이었다. 

이 왜국 왕실에 뿌리는 두는 인통姻統 하나가 더 구비됨으로써 신라 왕실은 오로지 소문국 피에만 의존한 왕비 공급 시스템의 불안정성을 극복하게 되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소문국 계열과 왜국 계열이 박터지게 쌈박질을 벌였다. 

암튼 이렇게 해서 소문국 독패 시대 그 왕비 자리 절반을 차지하게 된 왜국 혈통을 대원신통大元神統이라 해서 기존 진골정통과 구분하게 된다. 

왜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이 중요한가?

신라는 절저한 족외혼 사회였다. 족외혼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규율이었다. 

소문국에 뿌리를 둔 진골정통과 왜국에 뿌리는 두는 대원신통은 이 족외혼의 규율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혈통이었다. 

이는 왜 훗날 가야 왕실이 왕비를 신라에서 공급받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데도 실로 요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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