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신분해방3 대동보: 완전한 신분해방을 전제로 한 근대의 산물 우리는 족보, 대동보를 케케묵은 과거의 유산 조선시대의 고물 정도로 생각하지만족보 중 요즘 보급된 대동보는 과거의 고물이 아니라 그야말로 근대적 산물이라 할 수 있겠다. 앞에서도 썼지만 우리는 동성 친족집단 하면같은 조상 모시고 제사 지내고 제사 후에는 음식 나눠 먹으며 음복하는 형제 친척 정도로 생각하지만 조선시대에 동성친족 집단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앞에서도 썼지만, 조선시대는 한번 조상 중에 서자가 끼면 (얼자, 즉 어머니가 천민인 경우에는 이것도 안되었다)그 후손 전체가 금고 되어버리는 지라 과거 합격 자체가 되지를 않으니 (물론 19세기 이전 상황이다)한 마을에 동성집단이 있다 한들 그 안에는 적자 후손인 집과 서자 후손인 집이 공존하며서자 후손인 경우 결코 적자후손과 대등할 수 없음은19세기.. 2025. 8. 30. 대동보의 호황은 19세기 중반부터 우리나라 대동보 "산업"의 호황은 19세기 중반부터다. 왜냐. 호적을 보면 이때쯤이면 3-5명 정도의 사람들로 구성된 소농 가구가 동네마다 가득하여,이들이 죄다 유학을 칭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들이 유학을 칭한다는 건 자신들이 양반이라고 호적에 올렸다는 소리다. 양반이라고 호적에 올렸는데 족보가 없으면 되겠는가? 19세기 중반부터는 대동보가 초호황을 누리기 시작했음이 틀림없다. 이전까지는 족보라고 해 봐야 유력 가문 몇몇이 찍어 나눠 가지는 정도의, 아마도 잘해 봐야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사람의 문집이나 찍어 돌려보는 정도의 부수였을 텐데 19세기 중반 동네마다 유학을 모칭한 이들로 가득하니 우리나라 대동보 산업은 이때부터 초호황을 구가하여 그 흐름이 지금까지 이어졌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시점에 양반.. 2025. 8. 23. 우리가 19세기를 주목해야 하는 까닭 19세기는 개판 오분전으로 나라도 아닌 망조의 시대라는 선입견이 강하다. 정말 그러한가? 19세기야 말로 이전 시기의 신분제가 완전히 무너지는 시대이다. 이 백년 동안 실로 조선사회에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는데, 이 시대야 말로 어찌 보면 영-정조 시대보다도 훨씬 위대한 시대이다. 이 시기를 거쳐 이루어진 한국사 신분해방의 최종산물이야말로 수많은 "가짜족보"이다. 2023. 4. 4. 이전 1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