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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519

호계삼소 동양화를 그린 일본 서양화가 나까무라상, 천 년도 더 전 옛 이야기를 그리다1. 옛날 중국 진나라 때, 스님인 혜원법사와 시인 도연명, 도사 육수정 이 셋은 참 절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혜원법사는 여산 동림사東林寺라는 절에 머무르며, 절 앞을 흐르는 시내 '호계虎溪'를 건너지 않는 걸 철칙으로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스님이 잘 지내는가 싶어서 친구 둘이 들렀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얼마나 반가웠으랴. 혜원법사는 이야기에 취해 그만 냇물을 건넜다. 그러자 어디선가 범이 울부짖었다. 그 소리에 깨달은 세 사람, 누구랄 것도 없이 껄껄껄 웃었다 한다. 이 장면, '호계삼소虎溪三笑'는 이후 유-불-도 세 종교 화합을 상징하는 천고의 고사가 되었다. 2. '호계삼소'를 다룬 그림은 적지 않다. 하지만 딱! 떨어지는 작품은 많지 않.. 2024. 11. 25.
우리도 시도할 만한 과자 굿즈? 말차맛 청자운학문매병, 바닐라맛 백자 달항아리, 커피맛 분청자에 초코맛 나전칠기....우유맛 위에 초코로 추사 글씨를 아로새기고 커피로 겸재 그림을 그리고. 민트맛으로다가는 뭘 만드는 게 좋을지?솜사탕에 딸기 맛이라는 을 사 먹어봤는데, 사진과 실물이 제법 높은 싱크로율을 보인다. 크기가 조금 아쉬웠지만 너무 막 달지도 않고 향도 적당해서, 상하이박물관을 다니다 지치면 경험삼아 한 번 사서 드셔볼 만 하겠다(25위안). 강남엔 봄이 왔는데 내 통장엔 winter is coming이로구나.***필자 탐고 군은 현재 공무 중국 출장 중이다. 2024. 11. 23.
중국 박물관 찍먹 감상기 1. 전시 기법이야 한국에서도 많이 활용하는 것들이라 크게 새롭지는 않았다. 같은 기법이라도 보다 크고 좋은(상대적인 의미에서) 유물에 적용하면 더 돋보이는 것 아니겠는가.2. 어디에서건, '중국'을 증명하고 싶어하는, 아니 외치는 느낌이다. 하기야 우리도 한국이란 이런 것이다는 걸 박물관에서 보여주고 싶어하지만, 여기는 보다 더 강하게 느껴진다.3. 굿즈에 신경을 엄청 쓰는 수준을 넘어섰다. 아예 브랜드 메이커를 박물관에 입점시키고 박물관 소장품을 소재로 한 상품을 내놓게 했다. 4. 붓글씨 전시에 사람들이 엄청 몰려들었다. 왜 그런가 봤더니 왕희지, 왕헌지, 회소 같은 이의 작품이 나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이를 전시한다고 해도 이렇게 줄을 길게 서리라...믿는다.***필자 탐고 군이 현재 공무로 중.. 2024. 11. 23.
서지학의 개척자 학산 이인영, 그의 글씨는? 한국 서지학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이자 근대 사학자로 이름을 날린 학산鶴山 이인영李仁榮(1911-?)의 필적. 일제 때 여러 사람의 글씨가 담긴 서첩 속에 끼어 있었다(보여주시고 사진 게재를 허락해주신 소장자께 감사드린다). 1940년 5월 15일, 를 편찬한 기념이라는데 그때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젊은 학인의 글씨ㅡ그러나 이미 70년의 시간을 머금은 글씨다. 10년 뒤 그에게, 이 나라에 닥칠 운명을 알았더라면...어쩐지 처연해진다. (2018. 11. 23) 2024. 11. 23.
우리의 '유쾌한 천재' 동파거사 읊기를 동파 소식이 송나라 남쪽, 오령(五嶺, 난링산맥) 남쪽에서도 변방인 후이저우惠州로 유배되어 살며 이런 시를 지었다. 羅浮山下四時春 나부산 아래는 사철이 봄인지라 盧橘楊梅次第新 금귤과 양매가 차례차례 맺힌다네 日啖荔支三百顆 날마다 여지 삼백 알 먹을 수 있다면 不辭長作嶺南人 쭉 영남 사람 되는 걸 사양치 않으리 이 시가 조정에 알려지자 이놈 아직 정신 못 차렸다고 바다 건너 여기에서도 더 들어가야 하는 단저우儋州로 보냈다고 한다. ***editir's note *** 시도 잘 지어야 하고 미묘한 작품은 공간 시점을 잘 봐야 한다. 촌넘이 보통 어리벙벙 처음 혹은 간만에 중국을 가면 꼭 당시 송시를 찾는데 제주 촌것 다 된 강군도 예외가 아니다. 2024. 11. 20.
[기념품이 된 피양 명물] (2) 평양방송국 존경하는 석지훈 선생님이 댓글로 JBBK의 답을 달으셔서, 아는 분들은 다 알겠지만 그대로 밀고 나가기로 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직접 보시는 게 나으리라. 바닥면에 새긴 아홉 글자, "평양방송국 개국기념"이다. 이 땅에 방송이란 게 처음 등장한 것은 1927년의 일이다. 물론 그 전에도 시험삼아 전파를 송출하긴 했었지만 엄연한 프로그램을 틀어주는 방송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땐 TV는 없었다(생각보다 알려지기는 일찍 알려진다. "텔레비-죤으로 파송하여 왔습니다"같은 문구가 1930년대 잡지에 보인다). 라디오 전파를 정동 1번지 산마루(지금 덕수초등학교 터)에 세운 방송국에서 쏘아보냈는데, 그 전파 호출부호가 JODK였다. 일본에서 네 번째로 시작하는 방송국이라 D를 붙였다나. 그래서 방송을 시작할.. 2024.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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