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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439

할아버지의 장인어른의 장인어른도 할아버지 '나' 자신이 아버지 쪽뿐만 아니라, 어머니 쪽 가계와도 친족으로써 의식하고 있었으며 양쪽의 후손임을 자임했다는 이른바 '양측적 친속관계'는 고려시대의 사회풍속을 설명하는 중요한 논리이다. 실제 이는 많은 면에서 고려사회의 움직임을 설명해준다. 그런데 과연 고려만 그랬을까. 조선 초기의 그 유명한 안동권씨 가 서거정(1420-1488) 같은 외손이 주도해 만들어졌고, 수록 인물 대부분이 권씨가 아니라는 점은 일단 젖혀두자. 고려 유풍이 남아있는 시절이니까. 훨씬 후대로 내려와보자. 황현(1855~1910)의 에 따르면, 명성황후 민씨(1851~1895)는 영남 남인의 큰 어른이었던 우복 정경세(1563~1633)를 일러 "우복 할아버지"라 하였다 한다. 왜? 우복의 사위가 서인 노론의 정신적 지주 동춘당.. 2023. 1. 29.
생각도 안 한 금점판, 실록 충남반세기 초중고를 다 졸업했고, 지금도 부모님이 살고 계시니 내 정체성이 생긴 곳이 어디냐 물으면 대전입니다 라고 해도 크게 틀리진 않을 것 같다. 모처럼 설을 맞아 대전에 온 김에, "대전발 0시 50부~~ㄴ"을 흥얼거리며 대전역 앞에 갔다. 지인을 만나려면 1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하는 상황, 때마침 횡단보도 너머에 헌책방이 하나 있다. "옳거니!"하고 길을 건너 홀린 듯이 들어간다. 같은 걸 제외하고 그닥 쓸만한 책은 많이 없었는데, 우연히 눈길 닿은 곳에 이 책의 책등이 있었다. 집어들고 팔랑팔랑 넘겨보는데 어어, 이것 물건이었다. 3천원인가를 헌책방 주인께 드리고 품에 이 책을 넣어오고, 비행기에 태워 제주 땅에까지 모셔왔다. 한 며칠 대전에선 탐라 이야기만 포스팅했는데 이제 제주에서 대전 충남 이야기를 .. 2023. 1. 28.
작전회의보단 스테이크가 더 중요할 수도 있는 법 모처럼 집에 올라온 김에 책장에 쌓인 책들을 보다가 재미있는 이야기 한 토막을 얻었다. 6.25 전쟁에 참전한 어떤 장군 회고록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6.25 전쟁 당시 한국군을 크게 도운 미군 장성 제임스 밴 플리트 James Alward Van Fleet ( (1892~1992) 라는 분이 있었다.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공군 조종사였던 아들을 잃기도 한 그는 다른 미군 장성들보다 한국을 각별히 아꼈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노력했다. 그는 꽤나 대식가였다고 한다. 스테이크를 좋아했는데 그 크기가 보통 사람들의 그것에 비해 두 배는 족히 되어야 만족했다나. 그것까진 좋은데 가끔 그의 요리사가 난감해할 때가 있었다. 한국군 장성들이 작전회의를 하러 그를 방문하곤 했는데, 회의라는 것이 늘 그렇듯 가끔 식사.. 2023. 1. 24.
개경에서 찬밥 먹는 날을 당한 송나라 상단과 탐라 사절 널리 알려진 것처럼 고려시대에는 외국, 특히 중국 상인들이 빈번하게 개경을 드나들었다. 그런 만큼 고려 조정에서도 이들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다. 문종 9년(1055) 음력 2월 한식날, 불을 피우지 못하는 날이라 쫄쫄 굶고있을지도 모를 외국 상인들을 위해 고려 조정은 객관客館에서 거하게 식사대접을 하였다. 무신 한식寒食이므로 송宋 상인 섭덕총葉德寵 등 87인은 오빈관娛賓館에서, 황증黃拯 등 105인은 영빈관迎賓館에서, 황조黃助 등 48인은 청하관淸河館에서, 탐라국耽羅國 수령首領 고한高漢 등 158인은 조종관朝宗館에서 음식을 대접하였다. - 권7, 세가7 문종 9년 2월 이를 보면 송나라 사람들은 모두 240명이었고 탐라 사람들이 158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그 무리의 대표자를 가장 먼저 쓰게 마련이므.. 2023. 1. 23.
그대의 종이 되겠나이다 vs. 너는 나의 신하일 뿐 청나라 시대를 다룬 중국 사극을 보면 가끔 주인공이 황제에게 자신을 일러 "노재奴才 아무개, 황상을 뵈옵니다!"라 하는 경우가 있다. '노재'란 글자 그대로 '종의 재주', '종이나 할 재주' 라고나 할까?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단어는 만주인만이 황제에게 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냥 한인 신하는 물론이고 한군팔기漢軍八旗 곧 만주족에 편제된 한인들도 자기를 일컬을 때는 신臣이라고만 해야 했다. 만약 그들이 자기를 '노재'라 한다면?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에는 청나라 시절 관료들이 황제에게 올린 문서가 엄청나게 많이 남아있다. 거기에는 황제가 친히 붉은 먹을 적신 붓을 들어 댓글을 달곤 했다. 그런데 이를 보면, 한인 관료가 '노재 아무개'라고 썼을 때 강희제康熙帝는 '칭신稱臣이 가可하니라' 정도로 지나간 반.. 2023. 1. 22.
탐라 출신 관료, 대장장이 출신 관료 기록상 제주 출신으로 처음 고려의 과거에 급제해 관직생활을 한 고유高維라는 분이 있다. 이 어른은 뒷날 정2품 우복야右僕射에 오를 정도로 출세했지만, 섬 사람으로써 겪는 차별이 생각보다 컸던 모양이다. 문종 11년(1057) 정월 정기인사의 한 장면을 보자. 기축 고유高維를 우습유(右拾遺, 종6품)로 삼았다. 중서성中書省에서 아뢰기를, “고유는 탐라 출신이므로 간성諫省에는 합당하지 않은데, 만일 그 재주를 아깝게 여긴다면 다른 관직을 제수하길 요청합니다.”라고 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우습유는 중서문하성의 종6품 관직으로, 높지는 않지만 간쟁諫爭과 봉박封駁을 담당하는 청요직淸要職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 고유가 임명되자 중서문하성이 "탐라 사람은 사절하겠습니다"라고 어깃장을 놓은 것이다. 문종은 그 말.. 2023.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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