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探古의 일필휘지515 백운거사 집에 목필화가 피었네 이규보 집에는 꽃과 풀, 곧 화초도 제법 있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그의 집 뜨락에 봄이 찾아왔다. 꽃봉오리가 붓끝을 닮았다 하여 목필화라고도 하는 목련이 어느새 꽃을 틔운 것이다. 고개 들어 한참 바라보다가 아래를 내려다 보니 부추 잎처럼 길쭉한 풀들이 자라났다. 옛날 중국 한나라 때 학자 정현이 제자를 기르던 곳에서 났다는 서대초다. 길고 질겨서 책을 묶는데 썼다는 풀, 거기에 붓을 닮은 꽃까지. 글자로서 몸을 살찌우고 술로 영혼을 먹일 우리의 백운거사는 금세 시 한 수를 지어냈다. 하늘이 무슨 물건 그리려 먼저 목련을 피게 했는지 좋구나 서대초와 더불어 시인의 뜨락에 심었음이 天工狀何物 先遣筆花開 好與書帶草 詩家庭畔栽 [주-D001] 목필화木筆花 : 신이화辛夷花의 이명. 《초사楚辭》 구가九歌에 “.. 2023. 5. 23. 과거 합격을 위해선 출신지 세탁쯤이야 나라가 점점 기울어가던 1879년(고종 16) 3월, 어떤 경사스러운 일이 있어서 경과慶科를 치렀다. 그럴 때는 으레 변방 사람들에게 약간의 특전을 주곤 했다. 그것을 이용해서 급제하려고 한 사람이 있었다.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 김병수(金炳洙)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이번 경과(慶科)에서 각자 도(道)의 이름을 쓸 때 이희당(李禧戇)은 제주(濟州) 사람이 아닌데도 속여 써서 방목(榜目)에 끼게 되었습니다. 벼슬길에 나서는 처음부터 감히 임금을 속이는 죄를 범하였으니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속히 해당 형률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어찌 이같은 사습(士習)이 있단 말인가. 조정에서 이 지역에 뜻을 보인 것이 이로 인하여 미치지 못하였으니 더욱 통탄스럽다. 응당 처분이 있을 것이다." 하였.. 2023. 5. 18. 에블린 맥퀸 Evelyn McCune의 《한국미술사 The Arts of Korea》 저자 서명본 1. 다른 것들도 비슷하겠지만, 근대에 들어 한국사의 여러 분야에 외국인이 먼저 손을 대 연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대다수는 일본인 또는 서양인이었다. 한국미술사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독일인 안드레아스 에카르트(이분은 신부였다가 사퇴하고 결혼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나 일본인 세키노 타다시의 연구를 그 효시로 보곤 한다. 물론 시대와 역량의 한계가 뚜렷하지만, 앞으로 풍성해질 한국미술사 연구의 시작이란 의미는 충분히 가진다고 생각한다. 여기 소개하는 에블린 맥퀸 Evelyn McCune(1907~2012)의 《한국미술사 The Arts of Korea》(직역하면 '한국의 예술'쯤 되겠지만, 흔히 '한국미술사'라고 하는 모양이다)도 그런 초기 연구로서의 의미를 가지는 책이다. 2. 저자 에블린 맥퀸.. 2023. 5. 15. [책을 읽고] 정순임, 《괜찮지 않다고 외치고 나서야 괜찮아지기 시작했다》(파람북, 2023) 종가 종손이나 명가의 직계 후예를 만나면 일종의 경외감을 느끼곤 한다. 그들의 어깨에 얹힌 자부심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을지 대강이나마 짐작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경상북도에서도 내로라하는 종가의 따님이 썼다. 이제 그렇지 않으리라는 걸 모두 알면서도, 일반인에게 종가 따님의 이미지란 "노란 저고리 빨간 비단치마 입고 다소곳이 앉은 아리따운 별당아씨"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그건 그야말로 편견임을 깨닫게 된다. 편견 - 맞다. 이 책의 저자가 적어내려가는 글은,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편견'에 평생 온몸으로 맞서 싸웠던 투쟁기다. 글 곳곳에서 저자는 딸, 아내, 어머니라는 단어가 주는 편견을 담담히 그러나 통렬하게 꾸짖는다. 고생과 눈물에 얼룩졌으면서도 희망과 새로움이 번뜩이는 글자를 따라.. 2023. 5. 13. 타는 목마름으로, 고기를 갈망한 이규보 예전에도 한 번 말한 듯한데 이규보 선생님은 육식파였다. 소고기만 보면 먹지 않을 수 없었고 술안주로 기린을 구워먹고 싶다고 했었을 정도니까. 그렇지만 가난뱅이 하급 관료가 고기를 먹을 일이 얼마나 있었을까. 대개는 그림의 떡이었으리라. 그래서였을까, 그는 전주에 있으면서 고기도 제대로 못먹는 울분을 토해내는 글을 하나 남겼다. 삼가 채소ㆍ과일과 맑은 술의 제수로써 성황대왕城隍大王의 영전에 제사 지냅니다. 제가 이 고을에 부임하여 나물 끼니도 제대로 계속하지 못하는데, 어떤 사냥꾼이 사슴 한 마리를 잡아 와서 바치기에 내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가 ‘이 고을에는 예부터 매월 초하루에 저희들로 하여금 사슴 한 마리와 꿩 또는 토끼를 바쳐 제육祭肉에 충당하게 하고, 그런 뒤에 아리(衙吏, 아전)들이 공봉公.. 2023. 5. 11. 술은 겨울 모자, 머리 깎은 중한테 한 잔 권한 백운거사 나야 세상에 나온지 이제 30년 조금 넘었고 술 주자 주력은 당연히 그보다 짧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 동안 느낀 점 중 하나는 술은 좀 추워지는 겨울에 마시는 것이 좋더라는 거다. 눈내리는 겨울 밤 운치도 운치려니와, 술이 들어가면 몸에 열이 오르는데 특히나 여름날 진탕 마시면 얼굴에 땀이 흥건해져서 견디기가 힘들어진다. 그러니 오래 술자리를 이어가기엔 겨울이 그나마 제격이다. 난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고려시대에도 술이 들어가면 후끈해져서 따숩게 겨울 밤을 보내는 분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느 겨울날, 우리의 백운거사께서 술상을 봐 놓고 지인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그런데 그 지인이 다름아닌 스님! "거...안되는데..." 뻘쭘했는지 쭈뼛거리며 술잔을 받는 스님을 보며 이규보 선생님은 이렇게 농담.. 2023. 5. 10. 이전 1 ··· 36 37 38 39 40 41 42 ··· 86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