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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436

궁궐이 헐리면서 현판은.. 현판들은 때로 버려지거나 궁 밖 수집가 손에 들어가고, 대개는 수습되서 다른 궁궐 건물 처마 밑에 주렁주렁 걸린다. (2021. 11. 20) *** 편집자注 *** 살아남는 건 극히 일부이며 대부분은 군불로 사라졌다. 장작이었다. 2022. 11. 20.
청자 수선분水仙盆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에 있는 중국 옛 도자기 중에서도 첫손에 꼽는다는 보물이 있으니 북송 말 휘종徽宗 때 만든 여요汝窯 자기 수선분이다. 그 옛날 수선화를 심고 즐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그 색이 워낙 맑아, 비 그친 뒤 개인 하늘색 같다 하여 우과천청雨過天晴이라고 불린다. 펜으로 그 색은 재현 못하지만 수선화 두 뿌리 심는 것쯤이야 어렵겠는가. 2022. 11. 12.
식민지 시절, 재在평양 일본인들의 취미 1910~20년대, 평양 일대에 산재해있던 낙랑樂浪 고분 열에 아홉은 도굴꾼의 곡괭이를 피하지 못했다. 그 시절 도굴의 열기가 얼마나 거셌던지, 평양에 살던 일본인이 “1~2원을 주고 낙랑 청동거울 1점이나 토기 항아리 1점쯤 구입하지 못했다면 남한테 바보 취급을 당했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 편집자補 *** 도굴은 장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근자 중국에서 발견 발굴된 조조 무덤의 경우, 삼국지 그의 본기를 보면 죽으면서 무덤은 봉분을 만들지 말고 편평하게 해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하라 유언하는 장면이 있다. 그만큼 도굴을 두려워한 까닭이다. 한반도라 해서 사정이 다르지 아니해서 왕릉이 문종 이후인가? 회격묘 일색으로 변하고, 이른바 후장厚葬에서 박장薄葬으로 간 가장 큰 이유도 도굴에.. 2022. 11. 11.
1912년 가을, 금강산에서 온 엽서 일제강점기, 조선의 철도는 기본적으로 조선총독부 철도국 산하에 있었다(개인이 놓은 사철私鐵도 없지 않았으나). 이 시절은 지금 같은 고속도로는 물론이고 간선도로 자체가 충분치 않아서, 대량 운송에는 철도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런 만큼 철도국의 수장인 철도국 장관의 위치는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요즘으로 치면 국토교통부 장관에 맞먹는다고나 할까? 그런 지위였던 조선총독부 철도국 장관 자리에 처음으로 앉은 인물이 오야 곤페이大屋權平(1862~1924)라는 자다. 그는 1883년 도쿄대 공학과를 졸업하고 3년 뒤 철도국 기사가 된 이래 그 분야에서 승승장구했으며 구미 유학도 다녀왔다. 1903년 경부철도 공사 책임자로 부임하며 한국과 인연을 맺은 그는 승진을 거듭하며 훈장도 타고, 1910년 국망 이후 철도.. 2022. 11. 11.
식민지시대 목로주점 나는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먹을거리의 역사 이야기도 좋아한다. 같은 책은 한 열 번은 더 읽은 듯한데, 박현수 선생님의 이란 책을 보고 그때 그 감동에 필적할 만한 느낌을 받았다. 이는 근대 문학 속 먹을거리 이야기를 탐구한 책으로, 관부연락선의 3등칸 식탁, 김첨지의 설렁탕, 채영신과 박동혁이 굴비를 먹어가며 마신 약수...뭐 그런 그 시절 온갖 식사풍경이 책 한 장 한 장마다 펼쳐진다. 그 중 채만식의 이란 소설을 토대로 근대의 '목로주점', 또는 '선술집'을 재현한 부분이 흥미로웠다. 목로란 널빤지로 만든 길고 좁은 상이란다. 주모가 앉은 자리 앞에 길게 놓은 목로에 서서(앉아서가 아니라) 막걸리 한 잔을 시키면 안주는 그냥 하나씩 구워먹을 수 있고 술국도 공짜로 나왔다 한다. 김첨지가 치삼.. 2022. 11. 7.
60년 전엔 내 나이 스물셋 뱃속에 시서詩書가 몇백 짐이던가 腹裏詩書幾百擔 올해에야 겨우 난삼欄衫 하나 얻었다오 今年方得一欄衫 옆 사람이여 내 나이 몇이냐 묻지말게 傍人莫問年多少 육십년 전에 스물셋이었느니 六十年前二十三 -조수삼, (2016. 11. 6) *** 편집자注 *** 몇십년 전엔 내 나이 몇이니 하는 저 발상이 기발하다 할지 모르나 실은 표절이다. 한대 악부 이래 자주 쓰는 표현이다. 2022.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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