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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519

동경제국대 학생의 한달 경비 1938년 한 조사에 따르면 집에서 통학하는 동경제국대 학생은 한 달에 평균 27엔을 지출하는데 책에 10엔을 썼고, 하숙집에서 다니는 동경제대 학생은 한 달에 52엔을 쓰는데 책에 11엔을 지출했다고 한다. 생활비 20~30%를 책 사는 데 던진 셈. 어지간한 연활자본 책이 3엔 하던 시절, 10엔 11엔이라고 해봤자 서너 권 사면 끝이다. 거기에 펜이나 잉크, 공책 같은 문구류도 사야 했을 테니. 식비가 각각 4엔, 17엔이었다는데 이건 술값을 포함한 걸까? *** 이는 아마노 이쿠오 지음, 박광현·정종현 옮김, 《제국대학 - 근대 일본의 엘리트 육성 장치》, 도서출판 산처럼, 2002. 140쪽에 기초한다. *** Editor's Note *** 조선인 유학생의 경우는 어땠을까? 제대로 된 증언을 .. 2023. 6. 26.
화가 오타 기지로한테 쌩까임 당한 후지다 료사쿠 일본 근대 고고학 1세대로, 1921년 경주 금관총을 발굴해 우리에게도 유명한 고고학자 하마다 고사쿠 빈전경작 濱田耕作 (1881~1938)가 1924년 조선 땅을 다시 다녀간다. 그때 그와 함께 다닌 화가 오타 기지로 태전희이랑 太田喜二郞(1883~1951)가 하마다 행적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내 그림 두루마리(에마키)로 만들었다. 그걸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선총독부박물관이 1941년에 사진으로 찍어갔다. 그 마지막 장면인데,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날 밤, 후지타 료사쿠(1892-1960)가 하마다에게 이렇게 권한 모양이다. "센세이! 벚꽃 보러 안 가시렵니까?" 근데 뭐가 뜻대로 안되었는지, "밤벚꽃놀이 결의안"이 철회되고 만다. 이에 후지타군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가로등 아래 벚꽃이 흩날리는데, 손을 .. 2023. 6. 26.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그 답을 찾아서 (2) 안동권씨 시조 권행과 그 후손 1. 세가와 지리지를 우선 살펴보자. 여기서 930년(고려 태조 13), 왕건과 견훤이 자웅을 겨뤘던 고창古昌 전투의 바로 다음 대목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경인 고창군古昌郡 성주城主 김선평金宣平을 대광大匡으로 삼고, 권행權行과 장길張吉을 대상大相으로 삼았다. - 권1, 세가 1, 태조 13년 1월 태조 13년(930)에 후백제왕後百濟王 견훤甄萱과 이 고을에서 전투를 벌여 패배시켰다. 고을 사람 김선평·권행權幸·장길이 태조를 도와 전공을 세웠으므로, 김선평을 대광으로, 권행과 장길을 각기 대상으로 임명하였으며, 군郡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켰다. - 권57, 지리지 2, 경상도 안동부 연혁 여기에 김선평, 권행, 장길이란 세 사람이 나온다. 이들은 고창, 곧 지금의 안동 지역에 살던 유력 인사였음에 분명.. 2023. 6. 21.
둘째언니 드라마 "추노"를 통해서 최근엔 좀 알려진 사실인데, 원래 '언니'란 단어는 누이동생이 여자 형(?)을 부르던 호칭일 뿐만 아니라 남자 아우가 형을 부르는 호칭이기도 했다. 그 실제 용례를 여초 김응현(1927-2007)과 일중 김충현(1921-2006)에게서 본다. '선경'은 여초 선생의 자다. 2023. 6. 20.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그 답을 찾아서 (1) 평소 존경하는 블로그 주인장께서 이 내용을 한 번 정리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 권하셨다. 예전에 발표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좀 더 쉽게 글로 남겨보고자 한다. 지금까지도 한국에서 알아주는 성씨 중 하나인 "안동권씨安東權氏"에 얽힌 이야기이다. (미리 밝히자면, 난 안동권씨 친척이 없다. 지인은 몇 분 계시지만.) 1. 인터넷에서 흔히들 찾아보는 나ㅁ위키에선 "안동권씨"를 이렇게 설명한다. "안동 권씨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당시 고창古昌에서 별장을 지낸 태사공太師公 권행이다. 본래 신라의 왕성王姓인 경주 김씨였으며, 본명이 김행이다. 신라 추존 국왕인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이고, 김알지 계열 성씨이다." 이것이 오늘날 공인된 안동권씨의 출자의식이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일.. 2023. 6. 19.
1930년, 양의洋醫의 한의漢醫 인식 하라는 일, 쓰라는 글은 안 쓰고 엉뚱한 데 관심을 뻗치는 것도 참 병은 병이다. 하지만 이러한 호기심이 없었던들 인류가 인류로 살아남았을까?각설하고, 요즘도 무슨 열매나 풀뿌리 같은 걸 홍보할 때 "허준 선생의 에 이르기를 이거는...."하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걸 많이 본다. 그렇게 뭐든지간에 을 끌어들여 근거를 삼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예컨대 어떤 신문기사에 인용되었다면, 기사 작성자가 을 인용함으로써 자기 주장의 사실성을 증명하고 그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아가 이란 이러이러한 책이라는 걸 (적어도 그 기사의 작성자와 예상 독자는) 대강이나마 알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그런데 의외로, 미장원 잡지만큼이나 엄청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던 일제강점기 잡지에서 을 언급하는 경우.. 2023.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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