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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442

야호 유배 끝났다, 신나서 한라산 오른 면암 최익현 조선시대, 제주로 건너와 한라산 정상에 오른 이가 적지는 않았으련만 기행기를 남긴 이는 열 분도 안 된다. 그 기행기 중에서도 특히 명작으로 꼽히는 것은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의 다. 수능 국어 고전문학 지문으로도 출제되었을 정도니 말해 무엇할까. 오늘날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거두이고 대마도까지 끌려가 순국한 지사로 기억되는 면암이다. 그런 만큼 그의 글도 성리性理를 논하는 거대한 담론에 그치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막상 읽어보면 세세한 데까지 그의 눈길이 닿아있고 트여있음에 놀라게 된다. 도 그런 글이다. 1875년(고종 12) 봄, 2년 남짓의 제주 유배에서 풀려 자유의 몸이 된 면암은 이 참에 한라산을 올라보기로 한다. 여러 날 걸려 한라산 정상에 올라 백록담을 굽어보고, 제주.. 2022. 10. 9.
남송南宋 렌즈로 초사楚辭를 당겨 본 조선 사람들 "온 세상이 모두 흐린데, 나만 홀로 맑도다. 온 세상이 모두 취했는데, 나만 홀로 깨어있도다." "창랑의 물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 흐리면, 내 발을 씻으면 되지." 전국시대 말기, 기울어가던 초나라를 걱정하며 멱라수에 풍덩한 삼려대부三閭大夫 굴원屈原, 그를 후대 사람들은 존숭하고 또 사모했다. 이에 굴원의 작품뿐 아니라 같은 시기 사람들의 작품, 굴원을 본떠 지은 후대인의 시문을 모아 선집을 만드니 그것이 바로 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는 동아시아 각국으로 퍼져나갔고, 문학의 한 전범으로 여겨져 널리 읽혔다. 그런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남송의 주희朱熹가 엮고 주석을 붙인 가 유행했다. 근대 이전 조선에서 간행한 는 (임란 전이건 후건) 거의 100% 이 일 정도다. 이는 물론 주자성리학.. 2022. 10. 8.
하늘은 뿔을 주고는 날개까지 주지는 아니한다 우리의 이규보 선생님은 돌아가신 분을 기리기 위한 글, 묘지명墓誌銘도 여러 편 지으셨다. 그 중 한 편을 읽어보자. 대개 하늘이 베풀어주는 데에는, 뿔을 준 자에게는 날개를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비로 장원으로 급제하고도[龍頭選] 능히 높은 지위에까지 오르는 경우는 드물다. 공은 그렇지 않았으니, 이미 과거에서 1등으로 등과하고, 또 재상[黃扉]의 귀한 자리를 끝까지 밟았으며 거기에 더해 장수하여 슬프고 영화로운 일생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모자람이 없었으니, 이 어찌 이유 없이 그러하였겠는가? 무릇 반드시 하늘이 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이가 있어서 비록 많이 취하게 하였을지라도 하늘이 베풀기를 싫어하지 않은 것이리라. ... - 금의琴儀 묘지명 중에서 금의(琴儀, 1153~1230)는 무신정권기의.. 2022. 10. 6.
맷돌에 이파리 갈아 말차 드신 이규보 선생 요즘은 '별다방'에 가서 언제건 시켜먹을 수 있는 것이 '말차' 무엇무엇이다. 말차라떼, 말차 프라푸치노, 이젠 말차 슈패너에 말차 아포카토까지 나왔다나. 하지만 말차抹茶 곧 가루차는 그리 쉬운 물건이 아니었다. 수확 몇 주 전부터 차광막을 쳐서 그늘에서 기른 찻잎을 말려 줄기와 잎맥을 떼고 가루로 만들거나, 떡처럼 만들어 말린 단차團茶를 떼어내 가루내어야하는데 그 공이 보통 드는 게 아니다. 다른 건 그만두고라도 마른 이파리를 가루내려면, 그 시절에 믹서가 어디 있나? 맷돌에 가는 수밖에 없었다. 맷돌에서 나온 찻잎가루를 완碗에 담아 물을 부어 젓고 다시 뜨거운 물을 부어 마시는 게 옛날 송나라 때 차 마시던 방법이었다. 일본 다도가들이 다완에 말차를 풀어 젓는 모습을 상상하면 이해가 빠를까. 최승로가.. 2022. 10. 5.
국경의 밤, 일본군, 그리고 벼루(3) 1. 아마 거기서 복무하던 어느 일본군이 전역을 했는지 내지內地로 돌아가는지, 하여간 회령을 떠나게 되었던 모양이다. 이에 부대원들이 십시일반(일지, 강제로 뜯어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쨌건)하여 그를 위해 선물을 하나 마련했다. 지금 남아있는 유물로 보면 대개 그런 기념품으로는 욱일승천기와 부대 이름을 새긴 도쿠리[德利]나 술잔 같은 걸 선호했던 듯한데, 여기선 그 선물이 하필이면 벼루라니! 도대체 일본군과는 어울리지 않는데 말이다. 음, 하지만 ‘일본군’이라는 점을 한 꺼풀 벗기고 보면, 나름 신경 써서 ‘토산품’이라고 고른 것일지도 모른다. 회령 바로 아래 종성鍾城 고을은 조선시대부터 벼루로 유명했던 곳이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이른바 ‘종성연鍾城硯’은 명성이 높은 편이었다. 그 명성에 살짝 기대기 위.. 2022. 10. 2.
국경의 밤, 일본군, 그리고 벼루(2) 1. 이렇게 희한한 벼루는 도대체 누구를 위해 만든 것일까. 전체적인 생김새나 조각 솜씨를 보면 어딘지 모르게 일본풍이 감도는데, 정작 일본에 이런 벼루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까 제쳐둔 나무함을 보자. 함의 뚜껑을 보니 글자가 써져 있다. 좀 글씨 잘 쓰지 하는 마음이 절로 드는 악필이지만, 막상 읽어보니 그냥 넘기기 힘든 내용이다. “記念品 步兵第七十五聯隊 通信隊 會寧豆滿江産岩石 名硯石” 이라! 2. 보병 제75연대는 일본 육군 조선군 19사단 소속으로, 함경북도 회령會寧에 주둔했던 부대다. 회령이라고 하면 조선의 북쪽 끝, 김종서(金宗瑞, 1390~1453)가 개척한 육진六鎭 중 하나로 두만강 동안東岸에 자리한 국경도시다. 이곳은 두만강을 건너려는 이들과 건너지 못하게 하려는 이들 사이에 치열한.. 2022.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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