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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442

개화기 상소서上訴書와 우영우 "이의 있습니다!" 보통 이렇게 외치는 변호사는 없다고 한다(변호사 지인 두 분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얘기니 맞으리라). 하지만 사람들은 피고인 - 약자를 위해 변론을 펼치고 잘못된 것처럼 보이는 판결에 항소하는 변호사들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가 왜 인기였겠으며, 그 전의 그 숱한 법정드라마가 왜 만들어졌겠는가. 아마도 갑오개혁 즈음 인쇄된 것으로 보이는 형법서의 낙장을 몇 장 우연히 보게 되었다. 재판소니 검사니, 피해자니 피고인이니 하는 단어가 이때부터 있었구나 생각하니 퍽 흥미로웠는데, 개중 '상소서'란 문서의 서식 하나가 실려있었다. 재판장이 판결하여 내린 선고가 아무래도 '미타당'하므로 소를 제기한다는 내용이다. 과연 이 상소서를 써서 제출한 분(변호사와 피고인을 막론하고)들은 얼마나 있었으며,.. 2022. 9. 5.
조각가 문신이 시인 박성룡에게 보낸 편지 봉투 1. 군사정권이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1987년 1월 7일, 마산 추산동 52-1에 살던 조각가 문신文信(1922-1995) 선생은 서울신문사에 근무하던 시인 박성룡(1932-2002) 선생에게 무언가를 보내야 했다. 문선생은 단아한 필체로 자기와 받는이의 이름과 주소를 두꺼운 종이봉투에 적고, 봉투 안에 무언가를 넣어 봉했다. 그리고 그것을 우체국에 갖고 가 서울로 부쳤다. 2. 대개 우편물을 받으면, 봉투를 뜯어서 내용을 확인하고 난 뒤 찢어버리든 그냥 버리든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박선생은 어째서인지 그 봉투를 그냥 두었다. 언제부턴가 그 봉투는 세상을 떠돌았고, 어느 집 창고에서 묵고 있었다. 그러다 방랑의 길에 들어선 봉투, 새 주인을 만나고 그 손에 이끌려 사진을 박았다. 3. 올.. 2022. 9. 2.
옥주산인 김옥진의 모란 그림 1976년 어느 날, 옥주산인沃州山人 김옥진金玉振(1928~2017)이 붓을 들어 결혼하는 선남선녀를 위해 모란을 그려주었다. 이 그림을 받은 부부는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을까. 2020년, 세상은 이 단순한 소망마저도 사람들에게 거의 허락하지 않을 만큼 각박하기만 하다. 그래도 그 소망을 기원했던 모란꽃은 지금껏 흐드러지게 피어 남았다. (2020. 8. 28) *** 편집자注 *** 김옥진이 쓴 호 옥주산인沃州山人은 글자 그대로는 옥주라는 땅 산 사람이란 뜻이거니와, 예서 옥주沃州는 전라도 진도를 말한다. 김옥진은 진도 출신이라 출신지를 따서 이렇게 호했다. 줄여서 그냥 옥산沃山이라고도 했고, 옥주도인沃州道人 혹은 옥도인沃道人이라고도 했다. 뭐 쓰는 사람 마음 아니겠는가? 2022. 9. 1.
도장을 망실한 안중식, 변호사 개업한 변영만 - 1909년 대한민보 광고 1. 1909년 어느 날, 심전(안중식安中植) 선생이 물소뿔로 판 도장을 잃어버렸다. 누가 주워다가 어떤 그림에 찍고 "이거 심전 그림이오."하고 비싸게 팔았을는지도. 2. 1909년 어느 날, 산강재(변영만卞榮晩) 선생이 변호사 개업을 했다. 손님이 많았을지 적었을지. 2022. 9. 1.
권진규, 부처를 깎다 이 '불상'은 몸뚱이는 고려 철불이되 머리통은 금동미륵반가상의 그것이다. 이를 두고 작가 권진규(1922-1973)가 불교미술을 잘 몰랐다는 둥 그런 얘기를 하는 이도 있다고 들었다. 글쎄, 대 조각가 권진규뿐만 아니라 근대 일본 미술학교의 교습과정을 무시하는 발언 아닐까 한다. 권진규가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저렇게 조각을 할 분인가? 돌아가신 분은 말이 없으니 본래의 의도는 알 길이 없지만, 추측은 해볼 수 있겠다. 석가모니가 설산에서 수행할 때, 파순이라는 마왕이 온갖 방해를 일삼았다(아마 옆에서 파를 썰기도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 파순이의 항복을 받는 장면에서, 석가모니가 오른손 검지로 땅을 가리키자 땅의 신이 나타나 그것을 증명했다 한다. 다시 말해 석가모니가 성취한 정각正覺을 땅의 신이 증.. 2022. 8. 25.
김호진 계용묵의 제주 족적 광복 후 한동안 제주의 거의 유일한 신문사였던 '제주신보' 사옥은 지금의 칠성로 거리에 있었습니다. 그 시절 분위기가 그러했듯, 제주신보도 진보적 색채가 강했지요. 그 신문사 편집국장 이야기 하나가 전설처럼 전해집니다. 4.3이 한창 불붙던 시기, 편집국장의 친구가 지나가다 제주신보사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그 국장은 신문사 인쇄기로 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삐라를 찍어내고 있었다는군요. 서북청년단 사무실로부터 60걸음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음에도요. 대경실색한 친구가 만류했음에도, 그는 "산군들의 부탁이야"라며 태연하게 인쇄를 계속했다고 합니다. 그 편집국장은 뒷날 계엄사령부에 잡혀 수용소- '농업학교 천막'에 들어왔다가 고문 끝에 총살당합니다. 그의 이름은 김호진金昊辰이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다시 100여.. 2022.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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