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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528

열다섯살 고종의 글씨 1866년(고종 3) 가을 어느날 , 15세 먹은 소년 임금은 친히 붓을 들어 '실사구시實事求是' 넉 자를 썼다. 그리고 이를 홍문관에 내렸다. 이 글씨는 이후 동원 이홍근(1900~1980)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이 된다. 이때 이미 주연珠淵이란 호를 쓴 모양이다. 그런데 나이를 감안하더라도 필재筆才가 별로 없어 보이는 글씨다. 나름 단정하게 힘을 주려 한 흔적은 보이지만, 글자와 글자 사이 균형이 맞지 않고 구할 구求는 차조 출朮인 줄 알 뻔했다. 생生 아버지 흥선대원군(1820~1898)의 글씨처럼 추사체 느낌이 강렬한 것도 아니고, 어설프다? 적당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하기야 이때 이미 명필이었어도 이상한 일이었겠지만. 병인양요가 일어나는 것이 1866년 10월이다. 아마도 그 직전인 .. 2024. 10. 13.
조선왕조실록을 읽다가-사투리와 四土俚[사토리] 우리는 흔히 방언, 지방언어를 '사투리'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그랬을까."이필·전귀선이 승복하지 않으니, 형신刑訊[형벌로 심문]함이 마땅합니다. 다만 원고元告 전석정의 공사에 의심스러운 점이 많이 있고 또 석정이 바친 언문책에 토리土俚의 말 【속어俗語인 사토리四土俚다.】 이 있으며, 다른 사람은 그 토리의 말을 하지 않는데 석정만이 토리의 말을 합니다. 석정을 다시 힐문하게 하소서." (명종실록 권9, 명종 4년(1549) 6월 23일)이는 그 전날 전석정이란 인물이 '언문책'을 들고 와서 고변한 일을 두고 올린 계사啓辭다.여기서 俗語인 '사토리' 또는 '토리의 말'이 나타난다.아마 당시에도 발음은 사토리 또는 사투리였겠고 그걸 음차로 표기한 것일텐데, 그것이 '俗語'이고, 누구는 하고 누구는 안 했다.. 2024. 10. 10.
류큐 국왕 초상 오고에御後絵와 닮은 해인사 세조 초상 이렇게 동글납작하게 생긴 얼굴로 그런 대사를 한다면 확실히 어울리진 않겠지만, 이당이 그린 초본을 봐도 그렇고 그게 사실인 걸 어쩌랴.그나저나, 이 해인사 소장 세조 어진은 보면 볼수록 류큐 국왕 초상 '오고에御後絵'와 닮았는데 관련 연구가 있는지 모르겠다. *** Editor's Note ***  강민경 선생이 새삼 소개하는 이 세조 어진은 언제 알려졌는지는 모르겠다. 내 기억을 떠올리면, 내가 기자 초년병 시절에 이를 소개한 적이 있다. 그때는 발견? 이라는 식으로 보도한 기억이 또렷한데, 그 무렵 첫 보고였는지 아닌지는 기억의 착란으로 안심할 수는 없다. 중요한 지적인 듯한데, 제대로 검토가 이뤄졌는지는 모르겠다. 2024. 10. 9.
불구대천不俱戴天한 혜석惠石 조동윤趙東潤(1871~1923) 미술사가 오주석(1956~2005) 선생의 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오주석 선생이 간송미술관에 근무할 때, 채색된 난초 그림을 보았단다. "무슨 난이 이렇게 기름지단 말인가?" 그러다 옆에 붙은 화제를 읽고 고개를 끄덕였단다. 그 주인의 친일 행적 때문에. 그 '기름진 난'을 그린 이가 바로 혜석惠石 조동윤趙東潤(1871~1923)이다. 조동윤은 풍양조씨로, 그 유명한 신정왕후 조대비(1809~1890)가 고모할머니뻘이 된다. 그의 부친 혜인惠人 조영하(趙寧夏, 1845~1884)는 조대비의 5촌 조카로, 흥선대원군(1820~1898)과 친해 고종 등극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10년 만에 대원군과 척을 지고 그 세력을 몰아내는 데 힘을 보탠다. 그래서 정권이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출세가도를 달렸다. 하.. 2024. 10. 7.
구룡산인 김용진의 메시지 구룡산인 김용진(1878-1968)이란 화가가 있었다. 고종대 정승을 지낸 김병국(1825-1905)의 손자로, 시문과 서화에 능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작은 편지 한 장을 써서 누군가에게 보냈다. '우석'이란 사람인데, 동시대에 활약했던 '우석'으로는 연극인 박진(1905-1974)과 농학자 이창구(1904-1993) 정조가 있다. 그 둘 중 하나일지, 아니면 다른 사람일지는 모를 일이다. 엎드려 여행이 편안하기를 송축합니다. 오늘 오후 5시에 몸소 찾아주셔서 저와 더불어 회포를 푸시니 조금 위로가 되었습니다. 가거나 머무르는 정을 또한 감히 청하지 못합니다. 예를 갖추어 올리지 못합니다. 제 김용진 머리를 조아립니다. 이 정도로 짤막하면 편지라고 해야 할지 메시지라고 해야 할지, 카톡이라고 해야 할.. 2024. 10. 7.
이완용의 비서 이인직 , 같은 '신소설' 작가로 이름 높은 국초 이인직(1862-1916). 그는 상당히 소신있는(?) 친일파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완용(1858-1926)의 비서 노릇도 했는데, 그래서인지 이완용이 남긴 에도 이인직이 나온다. 1911년 4월 16일, 이인직은 항아리(병?) 하나를 들고 이완용을 찾는다. 이인직이 '가모식 석유加茂式石油'의 일로 그 물건이 담긴 작은 항아리 하나를 들고 와서 그 이용하는 방법을 설명하였다. 만약 그가 좀 다른 생각을 품었다면 성냥불 하나에 역사는 바뀌었겠지만, 그럴리가. "백작 각하, 이 석유로 말씀드릴 거 같으면..." 같은 썰을 푸는 것으로 그날의 만남은 끝이었다. 근데 '가모식 석유'가 뭘까? 2024.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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