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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441

거문고 안고서 떠나는 두루미를 본 현중화 제주 명필 소암 현중화(1907-1997) 선생이 칠순을 넘긴 80년대 이후의 어느 날, 거하게 약주를 하셨다. 이 어른은 약주-주로 꼬냑을 즐겨 자셨다고-를 어지간히 하셔도 흐트러지는 법이 없이 글씨를 쓰셨는데, 그날도 흥이 일었는지 지필묵을 찾으셨나보다. 그런데 하필 갈아놓은 먹이 좀 묽었던지, 첫획이 퍽 두껍고 연하게 나왔다. 다행히 글씨가 마구 번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붓이 오래 종이에 머무르면 먹물이 퍼지게 마련인 법. 소암 선생은 제법 빠르게 '포금간학거抱琴看鶴去' 다섯 글자를 예서로 종이 위에 옮겨놓았다. 종이가 살짝 비틀어졌는지 글자가 왼쪽으로 주루룩 올라가서 두루미 '학'자가 가장 높아졌다. 종이를 뚫고 학이 날아갈까 걱정하셨을까. 살짝 위치를 낮추어 갈 '거'자를 휙휙 긋고, 그 여세를.. 2024. 1. 4.
74년 전 보낸 아사카와 상의 새해 인사 1월 하고도 둘째 날이 되었다. 때마침 딱 이런 때 맞는 자료를 만나서 올려본다. 아사카와 노리다카淺川伯敎(1884~1964)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1913년 조선에 소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부터 1946년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33년간 경성에 살았다. 그러면서 그는 도예가이자 조각가, 하이쿠 시인으로 명성을 떨쳤고, '조선 도자기의 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한국의 도자기와 민예품에 천착했다. 교통이 불편하던 일제강점기에 전국 가마터를 무려 700여 곳이나 찾아내 답사할 정도였다니 그 열정을 알 만 하다. 사실 노리다카보다도 그 동생 다쿠미巧(1891~1931)가 이런 면에서는 더 유명한데, 그는 아예 한복을 입고 다니며 한국인과 가깝게 지냈고 죽어서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런 아사카와.. 2024. 1. 3.
담헌을 만나는 길 3-장산리 석불입상 그리고 홍대용 생가터 홍대용과학관 아래엔 작은 집 한 채가 더부살이하듯 있다. 일부러 그쪽으로 좀 돌아서 내려가보니 '천안 장산리 석불입상'이라고 고려시대에 만든 돌부처시란다. 기둥모양 통돌을 깎아서 서 있는 부처를 만들었는데, 퍽 두꺼운 옷을 입으셔서인지 옷주름이 섬세하진 못하지만 제법 소박한 맛은 난다. 또 대좌에 '장명리 향도'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니, 고려시대 이 지역 백성들이 한데 모여 이 분을 새기고 세웠을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런데 보호각 앞 설명문을 보고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풍만한 얼굴에 자비로움이 가득하고, 코는 무속적인 습속으로 훼손되었다." 라라나? 실제로 이분 코는 뭉그러진지 오래인지 시멘트로 때워져 있었다. 문제는 코뿐만 아니라 입과 눈에도 모두 시멘트가 베풀어졌는데 이 찬자께서 어.. 2024. 1. 1.
부여 수북정水北亭에서 이 부여라는 곳에 오면 금강은 백마강이라 불러야 맛이 난다. 임금 행차에 바위가 절로 뜨끈해졌다는 자온대自溫臺 위에 조선의 선비는 정자를 올렸다. 백제 700년 사직이 저 강물에 떠내려 간지 오래인데 자동차 소리는 참 무심히도 그 강 위를 울려퍼진다. 멀리 부소산성이 보이는데, 흘러간 옛노래만 그 시절을 기억할는지.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잊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에 울어나 보자 고란사 종소리 사무치는데 구곡간장 올올이 찢어지는 듯 누구라 알리요 백마강 탄식을 깨어진 달빛만 옛날 같구나 - 조명암, 가사 https://www.youtube.com/watch?v=G4XaI76rFb8 2023. 12. 31.
부평초 같은 인생, 풀 한 포기만도 못하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이종철이라는 분께 난 한 폭을 쳐 주면서 이렇게 화제를 써 주었다. 뜬구름 같은 인생, 대지에 핀 풀 한 포기만 못하다네 2023. 12. 31.
개성도서관장이 본국 의원한테 보낸 1937년 감사 편지 교토에 살던 후쿠다 세키지로(1882-1979)란 사람이 있었다. 야마구치현 출신으로 간사이법률학교 졸업 후 제약회사 사장, 비료회사 사장 등을 지낸 뒤 정치에 몸을 던진다. 교토시 의원, 교토부 의원을 거쳐 1932년부터 1942년까지 3연속 중의원 의원을 지낸 그는 1945년 이후 두 차례 의원 선거에 출마하지만 낙선하고, 정계를 떠났다. 10선도 모자라 자손에게까지 지역구를 물려주는 요즘 일본 의원에 비하면 짧게 끝낸 편. 그러고 구순을 훌쩍 넘겨 살았다(정계를 떠나서였는지?). 그런 후쿠다 상은 젊은 시절 한국에서 잠시 소학교 교장을 지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런 자료가 다 보인다. 대정 12년(1923)인지 소화 12년(1937)인지 모르겠지만 아마 그가 중의원 의원을 지내던 1937년이겠지 .. 2023.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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