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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491

[서예가 이완용] (4) 일품이라 할 만 하나... 배경 설명은 충분히 한 것 같으니 글씨를 보자(조금 더 거친 맛이 있는 지본으로 보겠다). 글씨 오른쪽 어깨가 올라갔다. 이런 경우는 매사 긍정적인 방향으로 보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한다. 또 글자 첫 획, 마지막 획이 길게 뻗는데 이는 자기 과시욕이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전체로 보면 글자들 균형은 잡힌 편이다. 이완용은 안진경체顏眞卿體를 주로 썼다고 하는데, 여기서도 글자 모양에서 안체顔體의 여운이 약간 느껴진다. 하지만 글씨에 뼈나 근육보다는 살집이 제법 느껴진다. 특히 호와 이름, 제문題文 부분의 작은 글자가 통통하다. 그의 다른 글씨(시고詩稿 같은)는 먹을 많이 묻혀 뭉텅뭉텅 써 내려가는 경우가 많다. 그것을 보면 역시 안진경(顏眞卿, 709~785) 글씨의 모습이기는 하되 이미 꼿꼿하고 날카로.. 2024. 7. 31.
[서예가 이완용] (3) 에도 선승 백은白隱 혜학慧鶴 아무래도 글쓴이가 이완용이다 보니 베낀 대상도 일본인이 아닐까 싶은 선입견이 있게 마련이다.그런데 그 선입견이 맞아떨어진다.백은 혜학(白隱 慧鶴, 1685~1768)이란 일본 에도시대 선승이 그 주인공이다.백은 혜학 - 일본어로는 ‘하쿠인 에가쿠’라 읽는다. 그는 일본 임제종臨濟宗의 개혁자이자 중흥조로 꼽힌다.임제종은 간화선看話禪 곧 화두를 들고 참선하며 깨달음을 찾아가는 중국 선불교 한 종파로, 우리나라 선종도 고려 말기 태고太古와 나옹懶翁 이후 임제종 법통을 이어받게 된다.  백은 스님은 깨달음을 얻은 뒤 특히 대중 포교에 힘썼는데, 어디서든 누구하고든 친구처럼 지내고 쉬운 말과 그림으로 부처의 가르침을 이해시켜주었다 전한다. 백은은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다. 평생 1만 점가량 서화를 그렸다고 하는데.. 2024. 7. 30.
[서예가 이완용] (2) 선필禪筆을 따른 자취 이완용의 트레이드마크라고까지는 못해도, 그가 유달리 많이 써서 남긴 글씨가 있다.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곧 ‘평상심平常心이 곧 도道이다’라는 내용이다(도 1, 2). 이는 중국 선불교의 종장宗匠 중 한 분인 마조 도일(馬祖 道一, 709~788)의 법문 중 한 구절이라고도 하고 남전 보원(南泉 普願, 748~834)의 말이라고도 하는데, 모든 분별을 끊고 억지로 노력하지 않는 ‘평상심’이 바로 진리라는 뜻이다. 여기서 소개하는 글씨가 바로 그 ‘평상심시도’다. 한데 그 형식이 독특하다. ‘평평할 평平’은 툭 내던지듯이 쓰고, ‘항상 상常’은 붓을 깊이 눌러가며 한 획에 찍어냈는데 수건 건巾 획을 둥그렇게 두 바퀴 굴리고서 밑으로 쭈우욱 그었다. 붓이 끝나는 자리에서 미련 없이 붓대를 다시 벼루로 옮긴다.. 2024. 7. 28.
[서예가 이완용] (1) 김은호가 기억하는 일당一堂 일당一堂 이완용(李完用, 1858-1926) - 대한제국의 마지막 총리대신, 일본제국의 조선귀족 후작侯爵 각하, 친청親淸에서 친미親美, 친로親露, 마지막 친일親日까지 자신의 정치행보를 끊임없이 바꾸어온 이. 살아생전 온갖 권세는 다 누렸으나 천하의 매국노로 지금껏 지탄을 받는 사람. 그는 살아서는 물론 죽고 나서도 사람들의 분노를 받아야했고, 깊은 산중에 자리했던 무덤마저도 파헤쳐졌다. 천만영화 의 모티브가 70년대 그 증손자가 벌인 이완용 부부 묘의 파묘였다니 지금까지도 이완용, 그의 이름은 사람들의 피를 끓어오르게 하는 모양이다. 그런 그에게 그나마 나은 수식어가 있다면 “명필”이다. 이완용이 붓글씨를 잘 썼다는 것은 유명하다. 대한제국 시기 그는 궁궐 현판과 상량문을 쓴 경험이 있었고, 일제강점기에.. 2024. 7. 28.
[탐라국통신] 제주에 기와는 언제부터? 제주에도 기와집이 '당연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당연한' 게 된 건 언제부터일까요. 제주 유적에서 기와가 확인되는 건 고려시대 이후부터입니다. 다시 말해, 이른바 탐라국 시절 층위에선 기와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죠. 그래서 국립제주박물관의 전시를 보다보면, 육지의 삼국시대~고려 초에 해당하는 시기를 다루는 '탐라실'에 기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육지 국립박물관의 삼국시대 진열장이 토기 1/3, 금속 1/3, 기와 1/3인 듯한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그 시절 탐라의 도회지엔 초가지붕만이 그득했겠군요. 물론 그렇다고 탐라국의 존재를 부정한다거나 폄하하는 건 결코 아닙니다. 단지 탐라가 육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 또 그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 텐데(자연환경이건, 경제적 조건이.. 2024. 7. 26.
다른 듯 닮은 이준용과 김응원의 글씨 왼쪽은 흥선대원군의 장손 영선군永宣君 이준용李埈鎔(1870~1917)의 글씨고, 오른쪽은 조선 말기 난초 그림의 명수 소호小湖 김응원金應元(1855~1921)의 글씨다. 이 둘이 무슨 관계가 있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생각보다 아주 가까웠다. 소호는 흥선대원군의 겸인傔人(양반의 비서나 시종 역할을 하는 하인)이었다고 하며, 영선군이 일본으로 망명할 때 그를 호종하여 10여년간 같이 일본에서 머물렀다. 이 글씨들도 '조선朝鮮', '한인韓人'이란 표현으로 보아 일본에서 쓴 것이다. 같이 지내면서 기질이 비슷해진 것인지, 영선군이 소호에게 서화를 익힌 것인지, 흥선대원군 슬하에서 벼루를 같이 쓰며 글씨를 배운 것인지, 1900년대 일본 서화계의 영향을 같이 받은 것인지 (혹시 대필?) 전후 사정은 좀 더 따져봐야.. 2024.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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