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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2471

일본의 항복에서 미군정까지 알다시피 일본의 항복은 1945년 8월 15일에 있었다. 이때부터 한국에 군정이 시작될 떄까지의 사건을 요약해 본다. 여운형의 건준의 활동은 초록색으로 표시하였다. 이들의 활동이 정상적인 활동이었는지 여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1945. 8.11-8.15일 사이: 조선총독이 여운형에게 인수인계를 제의 했다고 주장 1945. 8. 15 일본의 무조건 항복 조선총독이 여운형에게 행정권과 치안권을 이양했다고 주장. 여운형이 건국준비위원회를 가동. 1945. 8. 17 미국정부에 의한 군정명령 1호를 발효 (일본에 대해). 그 내용을 보면 미국은 일본에 대해 (조선, 대만 포함) 아래와 같이 해당 지역의 일본군 무장해제를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It instructed Japanese forces to su.. 2023. 6. 26.
태평양전쟁: 일본의 의도 태평양전쟁 초기 일본의 의도. 파란색으로 표시된 선 안의 지역이 소위 "남방작전"의 핵심 구역으로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원인에 해당한다. 이 지역에서 미국의 봉쇄로 부족해진 원자재를 획득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으로 실제로 일본의 태평양전쟁은 이 지역의 이해를 지키는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태평양에서 미국과 일본이 싸운 이유는 바로 파란 선 안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말이다. 나머지 또 하나의 목적은 중일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동남아시아를 손에 넣어 중국을 연합국에서 고립시키는 의도가 있었다. 어느 것도 동남아시아는 반드시 일본이 손에 넣어야 달성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이 개전 초 차지한 동남아시아를 지키기 위해 태평양 섬들에서 서진하는 미해군과 싸운 것이 바로 태평양전쟁이다. 이것이 당초 일본의.. 2023. 6. 26.
1943년까지 2차대전 전황과 조선의 상황 1942년 중반까지 일본의 태평양전쟁 최대판도는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미드웨이 해전 (1942년 6월)의 승전으로 미국은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지만 일본 해군은 여전히 건재했다. 이 시기에 조선에서는-. 3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국, 미국, 영국, 소련 측에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 일제, 일반 가정의 금속 공출 시작. 4월 18일 - 미국 육군 항공대 소속 지미 둘리틀 중령의 지휘하에 16대의 미국 B-25 폭격기 16대가 일본의 주요도시를 폭격한 이른바 둘리틀 공습(Doolittle raid)이 실행됨. 5월 - 잡지 가 로 제호를 바꾸고 민족지에서 친일지로 전향 조선어학회 잡지 이 통권 93호로 폐간 5월 8일 - 일제, 조선에 징병제 실시 결정 5월 15일 -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원봉의 조선.. 2023. 6. 26.
세계사와 한국사 동 시대 세계사 전개를 모르면서 이해 가능한 한국사란 하나도 없다. 일본이 어떻게 제국을 운영했는지 모르면서 조선의 30년대를 알 수 있을까 태평양전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무시하면서 해방전후사를 논할수 있을까 아니 인도사를 모르면서 왕오천축국전을 어떻게 이야기 하겠느냔 말이다. 전 세계 전염병 발생현황을 모르면서 조선의 역병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말이다. 애초에 "한국사"만 떼어 가르친다는거 자체가 무리에 억지스러운 일이었다. 한국사의 수준은 우리가 세계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2023. 6. 26.
1945년 6월 현재: 태평양전쟁 종료 2개월 전 한국 해방전후사의 정확한 인식을 위해서는 태평양전쟁을 제대로 따라가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설명하고자 한다. 1945년 6월 현재 미국 라이프지에 실린 전황도다. 사람 모양 그림 하나가 1개 사단이다. 다른 곳은 다 놔두고, 일본 본토와 만주의 관동군이 몇 개 사단이 이때까지도 남아 있었는지 보기 바란다. 이 지역에만 일본군이 아직 100만명 (100개사단)이 남아 있었다. 이 지도를 보면, 왜 미국이 소련에게 만주지역으로 밀고 내려와 달라고 요청했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이 상황 대로면 미군이 일본 본토를 공격했을 때 사상자가 얼마나 더 나올지 계산도 안 되는 판국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44년 6월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은 이미 소멸하여 사라지고 그 잔여 병력은.. 2023. 6. 25.
해방 후 위상이 바뀐 고보와 중학 조선에는 일제시대 중등교육과정에 중학과 고보 둘이 있다는 이야기는 이미 썼다. 이중 중학은 대개 일본인들이 다녔고, 고보는 조선인들이 다녔는데, 1922년 2차 조선교육령 이후 5년으로 동일한 학제가 되었다. 중학과 고보는 학생 구성원에 차이가 있고 한참 배우는 젊은 학생들이라 양자간 상당한 알력과 경쟁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는 일제시대 조선인 1고보, 2고보, 3고보를 자임했던 세 학교 (경성고보, 평양고보, 대구고보)의 이야기를 좀 적어보고자 한다. 일제시대 대도시에는 대개 같은 이름의 중학과 고보가 같이 있었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서울에는 경성중학 (일본인)과 경성1고보 (나중의 경기고), 경성2고보 (나중의 경복고)가 있었고, 평양에는 평양중학 (일본인)과 평양고보 대구에는 대구.. 2023.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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