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망 뒤 중국 망명, 회사 설립해 언제나 임정 자금책
해방 뒤 귀국해 한경직 목사와 영락교회 창설, 한태동 선생 선친

어느 기관이나 조직이든 실제로 운영을 하는 데에는 살림꾼이 필요한 법이다.
26년이나 존속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그러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중 한 명이 평안남도 중화 출신 독립운동가 한진교韓鎭敎(1887~1973)다.
일찍이 개신교에 입교하고 평소 정의감이 남달랐던 한진교는 망국 이후 베이징으로 망명했다가 1914년 상하이로 가서 해송양행海松洋行이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경영했던 인물이다.
그곳에서 나온 수익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헌납했으며, 이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었다.
1918년에는 청년 독립운동단체인 신한청년당 창립 멤버로 참여했다.
한진교를 포함한 6인 창당 멤버는 김철‧여운형‧장덕수‧선우혁‧조동호 등이다.
이들은 1918년 8월부터 준비해 11월 28일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을 창당했다.
'신한청년당'이라는 이름은 여운형이 터키 국부 케말 파샤의 '청년 투르크당'에서 힌트를 얻어 지은 것이나,
사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주세페 마치니의 '청년 이탈리아당'이 청년 투르크당에 영향을 주었으므로,
간접적으로나마 이탈리아 민족운동이 한국독립운동에 영향을 준 셈이다.
이후 신한청년당에는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을 비롯해, 김규식, 김구, 신규식, 이광수 등도 합류하게 된다.
이들의 대표적인 활동은 1918년 12월 독립청원서를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보낸 것과 1919년 2월에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해 한국의 독립을 촉구한 일 등이 있다.
모두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의 일이었다.
1919년 4월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들어선 후 한진교는 물밑에서 자금을 대고 여러 식객을 보살피며 독립운동을 도왔다.
또한 홍성린, 선우혁과 협의하여 인성소학교仁成小學校를 설립하는데 참여했다.
한진교가 설립에 참여한 인성학교는 상하이 거주 독립운동가 자녀들의 요람이었는데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을 비롯해 동생 안정근 자녀 모두, 그리고 안중근 외손녀 황은주에 이르기까지 안중근 집안 자녀들은 물론이고 임정 요인 자제들이 이 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았다.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과 손정도의 아들 손원일이 인성학교 동창으로 훗날 인연이 이어지게 된다.)
임정 수립 이후에도 한진교는 꾸준한 활동을 한다.
초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약하다가 고향인 평남 중화군 조사원으로 임명되어 그 지방의 유력자, 재산가, 학교, 종교 실태 등을 조사하여 임시정부에 보고하였으며, 이 자료들을 근거로 하여 임정의 기반을 다지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20년 11월에는 대한인거류민단 의원으로 교민들의 자치 및 복지향상에 기여하였고,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에 가입하여 한중 공동 항일전선을 구축했다.
1921년 5월 임시정부가 내분에 빠지자 그는 이탁, 차리석, 송병조 등과 함께 국민대표회 기성회를 조직하고 그 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22년 7월에는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만들어 독립운동 단체의 통일을 기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또한 1924년에는 안중근 동생 안정근이 이끌던 대한적십자회 정기총회에서 김구, 이유필, 김규식, 정애경 등과 함께 상의원에 피선되어 활동했다.
1925년 2월에는 신한청년당 이사장에 김규식을 추대하면서 자신은 여운형, 서병호, 김철 등과 함께 이사에 선출되었다.
1926년에는 엄항섭, 송병조 등과 함께 '임시정부 경제 후원회'를 조직하여 임정의 재정을 지원했는데
여기에는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노구를 이끌고 정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신한청년당이 해체되고 난 뒤인 1930년에는 안창호, 이동녕, 조완구, 김구, 엄항섭, 이시영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조직했다.
이 당시 한진교 개인과 관련해서는 얼마 전 언론에 오르내린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국적 시비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다.
1923년 2월 한진교는 일본 화폐를 위조한 죄로 프랑스 조계에서 체포되었고, 상하이 회심아문會審衙門으로 넘겨졌다.
중국 개항 이후인 1860년대 창설된 회심아문은 중국인 재판관과 외국인 재판관이 합동으로 심리하는 상하이 조계의 재판 기관이었다.
당시 한진교는 이미 중국 국적을 취득하고 귀화한 상태였으므로 중국은 그를 중국인으로 인식했다.
이와 달리 일본 총영사관은 한진교는 (조선적을 지닌) 일본 국적자라는 점을 근거로 1923년 3월 중국에 공식적으로 그의 신병 양도를 요구했다.
중국은 그가 이미 적법 절차를 거쳐 중국 국적을 취득하여 “귀화 허가 증서”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서 일본의 요구를 묵살했다.
한진교의 국적을 두고 중·일의 입장이 첨예하게 부딪히자 결국 프랑스가 중재하고 나섰다.
그 결과 한진교는 1923년 12월 무렵에야 프랑스 조계로 송치되어 재판받게 되었다.
프랑스 조계 재판부는 범죄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며 그를 프랑스 조계 밖으로 추방하는 선에 머물렀다.
적어도 이 당시 상하이에서는 일본이 중국으로 귀화한 한국인을 일본 국적자로 여겨 자의적으로 처리할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이후에도 한진교는 임정에 남았고 정부가 상하이에서 중경으로 옮겨가 광복을 맞을 때까지 궂은 일을 도맡으며 각종 연명서에 빠짐 없이 이름을 올렸다.
광복 후에는 고향으로 들어갔다가 곧 월남하여 한경직 목사와 함께 서울에 영락교회를 세우고 장로를 지냈다.
한진교는 임정에서 활동할 당시 특히 여운형, 선우혁 등과 친했는데 같은 또래에 같은 신앙을 가진 까닭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이상 살펴본 바로 보면 한진교 개인의 업적은 두드러지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으나 한국독립운동, 특히 임시정부의 고비마다 그의 이름이 보인다.
임정의 창설부터 광복에 이르니까지 꾸준하고 든든한 지원세력으로서 한진교의 존재는 컸다.
무슨 일이든 현장 실무자가 있어야 돌아가기 마련인데 임시정부가 유력 정치인들의(임정 수뇌부의 독립운동은 정치활동이었다.)
단순한 모임이나 단체가 아닌, 정식 기관으로서 기능하게 된 데에는 한진교 같은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개신교 장로인 한진교가 세례명처럼 쓴 영문 이름은 '에녹Enoch'인데, 에녹은 구약 창세기에 나오는 너무나도 유명한 인물로 969세를 살아서 장수를 상징하는 므두셀라의 아버지이자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노아의 증조부이다.(카인의 아들, 즉 아담의 손자 이름도 에녹이지만 이쪽은 덜 유명한지라 스쳐지나가는 정도다.)
에녹은 365년을 살다가 산 채로 승천했다고 기록된 인물인데, 이 이름을 쓴 한진교 본인 역시 갖은 풍파를 겪고도 그 시대 인물로서는 장수한 86세를 살았고 연세대 신과대학장을 지낸 그 아들 한태동 선생은 101세의 수를 누리고 이번 광복절에 소천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나라를 잃고 광복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오늘날에도 각자의 위치를 지키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하는 모든 분들을 생각하며 80돌을 맞은 광복절 연휴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덧) 한진교가 영문 이름을 에녹으로 정한 깊은 뜻이 있다면 그 후손 중에 노아와 같은 인물이 나와 세상을 구원하기를 바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진교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신한청년당 #해송양행 #인성학교 #한중호조사 #시사책진회 #대한적십자회 #임정경제후원회 #한국국민당 #영락교회 #한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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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안중근기념관 이주화 학예부장 글이다. 그의 아드님 한태동 교수께서 근자 타계했고, 내가 생전에 선생을 통해 선친 이야기 몇 가지를 통해 임정과 관련한 언급을 하신 기억이 있기에 이 부장께 한진교에 대한 글 한 편을 따로 부탁드렸다. 이 부장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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