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역사문화 이모저모 2420 왜 신라 무덤 유물이 압도적인가 도굴꾼 때를 타지 않은 무령왕릉은 백제 왕과 왕비가 죽어 어떤 방식 혹은 껴묻거리와 더불어 장송葬送했는지를 적나라히 보여주었으니, 그것이 출토한 유물은 왕과 왕비 합장릉이라 해서 적지 않은 수량을 자랑하지만, 문제는 동시대 신라 무덤에 견주면 그 수량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 무령왕 부부릉 출토품이 많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이것도 상대성에 지나지 아니해서 동시대 혹은 그 어간 아래위로 위치하는 동시대 황남대총이나 천마총을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를 빚게 된다. 왜 이런 부조화가 빚어질까? 실로 단순한 이 질문을 나는 고고학도가 던지는 모습을 못 봤다. 왜일까? 나는 그게 궁금해 죽겠는데 저들은 왜 넋놓고 딴 데만 파고 있을까? *** previous artic.. 2024. 1. 18. 추모왕의 승천과 나주 정촌고분 금동신발 "(추모왕이) 세속의 왕위를 달갑게 여기지 않으시니 (하늘이) 黃龍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이에) 왕은 홀본忽本 동쪽 언덕에서 용 머리를 발로 딛고서는 하늘로 올라가셨다.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 履龍首昇天]" 광개토왕비가 정리한 추모왕 죽음이다. 왜 황룡인가? 왜 '리용수履龍首'인가? 이거 그림으로 누가 한번 그려봐라. 어떤 모습 나오는지? 보여? 금동신발 신고 신선 되어 하늘을 나르는 추모왕 모습 보여? 금동신발....이거 도교말고는 접근할 방법이 없다. 금동신발과 환두대도 모두 도교 신학의 발상이다. 한국문화사 구명에 도교는 불교보다 중요하다. 한데 도교를 아는 놈이 없네....(2017. 1. 18) *** 나주 정촌고분 백제 금동신발이 저 추모왕 승천 이야기.. 2024. 1. 18. 정비석 자유부인(정음사, 1954)의 대문 화교회花交會 가을-. 맑게 개인 일요일 아침이었다. 소장파 한글학자 장태연張泰淵교수 댁에서는 지금 막 아침식사가 끝난 판이었다. 두 아이들은 어느새 밖으로 놀러 나가고, 장 교수는 동저고리 바람으로 밥상머리에서 조간신문을 읽고 있다. 교수 부인 오선영吳善英 여사는 빈 그릇들을 한데 겹쳐놓고, 식탁에 행주질을 하면서 "당신 오늘 집에 계시죠?" 하고 남편에게 물었다. 그리나 남편은 대답이 없다. 마침 신문에는 철자법 간소화 문제에 대한 문교 당국의 담화가 발표되어 있어서, 장 교수는 그 기사를 읽기에 여념이 없있던 것이다. 육이오사변이 일어났다는 신문 호외에도 별로 놀랄 줄을 모르던 그였것만, 한글에 관한 일이라민 일단짜리 신문기사에도 천하가 뒤집히는 듯한 중대성을 느끼는 장 교수였다. 2024. 1. 17. [지증왕의 아버지를 찾아서] (3) 모든 혼란을 해결한 화랑세기와 상장돈장 앞서 제시한 화랑세기와 상장돈장 계보는 지증의 두 아버지를 둘러싼 모든 문제를 단칼에 해결한다. 첫째, 기보와 습보는 별개 인물이다. 기보는 내물왕비 보반이 실성왕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 이 점에서 유의할 점이 기보를 삼국유사에서 “눌지왕의 동생”이라 한 대목이다. 눌지왕의 동생이라 했지 결코 내물왕의 아들이라 하지 않았다. 눌지는 내물왕과 보반 부인 사이의 소생이다. 기보와는 어머니(보반)가 같은 형제다. “눌지왕의 동생”이라는 삼국유사 언급을 우리는 지금까지 아버지(내물)가 같은 인물로 간주했다. 하지만 왜 삼국유사가 기보를 일러 “눌지왕의 동생”이라 굳이 했겠는가? 반면 습보는 내물왕과 보반 부인 사이에서 난 세 아들 중 복호의 아들이다. 복호가 성명聖明이라는 여인에게서 낳은 아들이 습보다. .. 2024. 1. 17. 광개이목廣開耳目, 이찰만방以察萬方 전한前漢 말기 문사文士 유향劉向이 찬한 설원說苑 중 제1편 군도君道, 즉 임금이 가야할 길 첫 머리다. 진晉 평공平公이 사광師曠한테 물었다. “임금이 가야 할 길은 어떠오”. 대답하기를 “임금의 길은 맑고 깨끗이 하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는 데 힘쓰고 어진 사람을 발탁해 일을 맡기며, 귀와 눈은 널리 펴고서 만방을 살피되, 세속에 휩쓸리지 않으면서도 측근들한테 휘둘리지 않아야 하며, 탁 가슴을 연 채 멀리 바라보면서 홀연히 서야 하고, 신하들이 한 일을 잘 살펴서 신하들에게 군림하는 일이니 이것이 바로 임금 노릇하는 요체입니다.” 평공이 말하기를 “옳습니다” 晉平公問於師曠曰:「人君之道如何?」對曰:「人君之道清淨無為,務在博愛,趨在任賢;廣開耳目,以察萬方;不固溺於流俗,不拘繫於左右;廓.. 2024. 1. 17. 백제와 신라 동시대 무덤 모식 물론 시기를 확정해야 하니 왕릉급 기준으로 백제가 저런 식으로 변모한 것은 확실히 475년 웅진 천도 이후이며 망할 때까지 저 골간을 유지했다. 다시 말해 저 기간 동안 백제는 산 구릉에다 기본으로 묘광을 파고 들어가서 그 안에다가 시신을 매장했다. 이 경우 산 혹은 구릉 자체가 봉분이라 봉분을 크게 만들지는 않아 높이라 해 봐야 일미터 남짓하다. 동시대 신라는 왕청 나게 달라 지증왕 때까지는 평야에 쓰다가 법흥왕 이후는 경주 분지를 탈출하면서 입지조건은 백제랑 비슷해져 구릉으로 이동한다. 다만 외곽으로 가기는 해도 일부는 여전히 평지를 고수하기도 한다. 문제는 본능. 신라는 결코 기슭으로 가도 우람한 봉분을 포기하지 않았다. 여전히 산더미만한 봉분을 쌓아 이곳이 무덤임을 표식했다. 동시대 가야는 조금 .. 2024. 1. 17. 이전 1 ··· 181 182 183 184 185 186 187 ··· 404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