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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2420

[독설고고학] 껍데기 너머를 보라 아침에 호로고루를 이야기했지만 거기 처음 간 때부터 나는 성벽 너머가 언제나 걸렸다. 물론 저 성곽이 한창 운용되던 천오백년 전 지표가 지금과는 많이 달랐겠지만 저 넓은 땅을 가만 두지 않았으리라는 의구심이 언제나 증폭했다. 더구나 그 성벽 너머 땅은 현무암 지대고 홍수 피해가 거의 없을 만한 데였으니 저 땅에서 콩이나 조 수수 농사를 지어 살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성곽? 뭐 대단하게 생각하나 실제 전쟁 몇 번이나 치렀을 거 같은가? 징발된 병사들 일년 내내 탱자탱자했다. 그러다 제대했다. 그런 친구들이 그렇담 평양에서 꼬박꼬박 보내주는 월급 타가며 생활했겠는가? 그럴 돈도 없었다. 거지였다. 그렇담 어찌 생활했는가? 지들이 농사 직접 짓거나 농민들 감독해서 그에서 나는 소출 일부 띵가묵고 살았다... 2024. 1. 4.
전쟁통에도 군인들이 쪽도 못쓴 조선왕조 지극히 당연하지만 전란의 시대는 군인이 활개를 치기 마련이고 평화의 시대는 군인은 쥐 죽은 듯 지내기 마련이다. 오직 예외가 조선왕조이거니와, 이 놈의 왕조는 어찌된 셈인지 임란 병란 양란에 전 국토가 초토화했으면서도 무인이 활개를 칠 수 없는 구조였다. 나는 이를 비정상적인 사회로 본다. (2016. 1. 2) *** 그렇다고 내가 군인정치를 추앙하는양 개설레발을 치지는 말아줬음 한다. 전쟁통엔 당연히 군입 입김이 쎄기 마련이고 그게 정상이다. 한데 유독 조선왕조가 예외라 고려도 한때 저랬다가 나라가 거덜났다. 2024. 1. 4.
[독설고고학] 연천 호로고루, 성벽을 벗어나야 호로고루가 보인다 연천 호로고루성이다. 보다시피 임진강으로 삼각형으로 삐죽하니 돌출한 곶에다가 한 쪽만 막았다. 나머지는 현장 가 보면 분명하지만 천애절벽이다. 좀 더 확대한 모습이다. 저 호로고루는 지금의 LH박물관이 토지공사 시절 그 박물관에서 연차 조사를 벌인 결과 고구려가 쌓고 이용한 군사기지로 드러났다. 잠깐 사용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장기간 주둔하며 이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문제는 성벽 바깥 세상이다. 한국고고학은 성곽을 논할 때 단 한 번도 성벽 바깥을 생각한 적이 없다. 고작 배수로 운운한 게 전부였다. 성벽을 벗어난 저 바깥 세상. 저기는 뭐하는 곳이었을까? 이걸 고고학은 물어야 한다. 하도 갑갑하니 내가 대답한다. 농사 지었다!!! 둔전屯田이다. 아래 글에 대한 답변이다. *** previous ar.. 2024. 1. 4.
제도로서의 조선고고학, 그 위대한 설계자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 흑판승미黑板勝美, 쿠로이타 카쯔미, 현행 외래어 표기로는 구로이타 가쓰미인 이 양반은 수십년래 내 화두다. 도쿄제국대학 교수. 생김새는 조폭 두목. 제도로서의 한국고고학 조선고고학을 확립한 주축이다. 그는 일본 고문서학의 히말라야요 동양사의 후지산이다. 첫째..이런 그가 왜 그리도 고고학에 집착했는가? 둘째, 이런 그가 왜 그리도 조선에 집착했는가? 셋째, 이런 그가 왜 고적조사연구회를 꾸려 사방팔방으로 모금을 하러 다녔는가? 1915년 그는 도쿄제국대학에 출장 복명서를 낸다. 백일 동안 조선 각지를 조사하겠다는 담대한 계획이었다. 실제 그는 그리했다. 그해 부여에 들른 그는 삽자루를 잡고는 능산리 무덤 두 기를 파헤쳤다. 왜그랬을까? 조선사편수회 회의록을 보면 모든 회의는 흑판이 주도한다. 모든 발제는.. 2024. 1. 4.
왜 혁명은 주변부에서 주도하는 위만과 온조를 보면 안다 사회 변혁의 주체 혹은 동기로서 혁명은 언제나 주변부에서 일어난다. 왜 그런가는 중심부를 차지한 주류는 본능 혹은 생득으로 기존 체제를 옹호하며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까닭이지 무슨 개뼉다귀 같은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이는 중심부로 치고 들어가고자 하는 지역의 욕망을 부채질하는데, 언제까지 이들이 시다바리 총알받이로 만족할 수는 없는 까닭이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모조리 혁명, 그 완성으로서의 새로운 왕조는 주변부 차지였다. 중국 상주商周 이래 처음으로 중국대륙을 대략 700년 만에 통일한 왕조는 서북쪽 변방 진秦이라는 촌놈들이었고, 그를 이어 새로운 권력으로 출현한 유방은 산동성 촌놈이었다. 수당을 건국한 주체 역시 북쪽 周 계통 유목민 후손들이었다. 다 그렇다. 신라? 어디서 굴러먹다온 개뼉다귀 같은 .. 2024. 1. 3.
공터를 찾아 도성을 만든 중국 일본이랑 한반도는 다르다 조선왕조가 출범하고서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새로운 도읍 건설이라, 이를 찾아 신왕조가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는 비교적 잘 알려졌거니와 한때는 계룡산 기슭도 검토되었다는 사실 역시 잘 안다. 그 절대 조건으로 풍수를 들지만 이는 실상 개소리라, 풍수가 맞다 해도 문제는 거기에 도시가 들어서 있으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이 점이 역사학이나 고고학에서는 자주 망각되는 게 아닌가 하는데, 신도시 건설 제1 조건은 공터다. 이 공터는 또 제반 조건이 있으니, 무엇보다 강이 흘러야 하지만 이 강은 이율배반이라, 그러면서도 홍수 침패 우려가 적거나 없어야 한다. 그렇게 고심한 한양만 해도 잦은 청계천 범람으로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그것을 준설한 영조의 회고를 보면 안다. 지금의 경복궁 창덕궁 일대? 간단하다... 2024.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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